“오래간만이야. 강여울?” 전남편이 나의 클라이언트로 돌아왔다. 거부할 수 없는 계약서를 가지고서. 이혼한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까 강여울이랑 못 해 본 게 있더라고. 결혼도 했고 이혼도 했는데 말이야.” 예쁜 입술 끝을 당겨 웃으며 그가 말했다. “연애를 해 봐야겠어. 강여울이랑.” 그러곤 여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끔씩 입술 안쪽이 쓰라려. 기억나? 네가 내 입술 물어뜯었던 거.” 가까이 다가온 그가 키스라도 할 줄 알고 눈을 감아 버린 자신의 행동이 수치스러웠다. 그의 말에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이 남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렇게나 선을 넘는다. 그리고 잔잔한 호수를 뒤흔든다.
함께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복오빠만 죽고 서희만 살아남게 된 날. 서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됐다. ‘네가 주안이 대신 살아 있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네가 내 아들 대신 살아 있는 이유는 증명해야 내가, 내가 너를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혼자 살아남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해온 그룹의 강태주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진짜예요?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게?” 태주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심심하던 찰나에 가지고 놀기 좋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이 스쳤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을 할 겁니까?” “…….” “다른 남자의 손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증명,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어렵게 말을 내뱉는 서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 자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미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서희에게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대표님의 오늘 밤을 저에게 주세요. 그게 올해 제가 가지고 싶은 생일선물이에요.” 10년 동안 짝사랑해왔던 차윤의 비서를 그만두기 두 달 전. 재희는 호기롭게 그의 하룻밤을 선물로 달라고 말했다. “나 신 비서님 같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그런 좋은 사람 아니에요.” 재희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려 하자 곧 윤의 혀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제가 경고했잖아요. 저 좋은 사람 아니라고.” 평소 부드러운 윤의 어조가 아니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귀를 울리는 차량의 경고음처럼. “재희야, 생일 축하해.” 재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생일선물이었다.
“재벌집 아들이랑 적당히 놀아주고 돈 받는 게 꽤 괜찮은 장사였던가 봐?” 한때 사랑을 말했던 그가 이제는 경멸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봄을 바라본다. 6년 전,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던 진짜 이유를 도경은 모르니까. ‘네가 정말로 도경이를 사랑하는 거라면 그 아이 앞길, 더 이상 막지 마라.’ ‘…….’ ‘너희 아버지 회사도 같이 죽이고 싶은 건 아니잖니?’ 봄은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도경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는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기에. 그가 저 같은 건 잊고, 오로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사채업자에게 붙잡힌 아버지의 빚을 빌미로 도경은 봄을 옥죄어 온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시선 피하지 마.” “…….” “매시간, 매분, 매초 넌 내가 필요할 때면 내 앞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 내가 돈으로 너를 샀으니까.” 진득한 원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눈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