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채
오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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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 남자는

소개팅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눈을 뜬 나라. 함께 누워 있는 남자의 정체는 소개팅 상대가 아닌 소개팅 상대의 친구였다. 어제저녁, 상대의 친구라며 자연스럽게 소개팅 자리에 합석했던 그였다. “내가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건 너랑 단둘이 있는 거야.”자신을 쳐다보는 맑은 눈동자와 달콤한 사탕발림에 그대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다급하게 호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안녕. 고나라 비서.” 그날 밤,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곳은 다름 아닌 회사였다. 그것도 앞으로 제가 모셔야 하는 상사로. ***“나라야. 사람은 때론 계획에 없는 짓을 하기도 해.”“…….”“충동이라고 하지. 그런 걸.”장난기는 묻어 있지 않았고 오로지 진심만을 전하는 듯 나직하게 읊조렸다.“왠지 난 오늘 하고 싶지 않은 충동적인 짓을 하게 될 거 같아. 왜냐면….”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낯선 감정이 가슴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속절없이 긴장한 탓에 열이 올라 목덜미가 뜨거워졌다.“시간은 흐르고 헤어질 시간은 다가오는데 너랑 헤어지기 아쉬우니까.”후덥지근한 공기에 목덜미를 문지르던 나라가 타는 입술을 적셨다.“그러려고 번호… 준 거 아니에요?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우리 3차 갈까.”저 예쁜 입술이 제게 무엇을 줄지 아는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많은 상황이 이 남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소개팅을 주선했던 친구의 얼굴, 흥미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함께 있었던 소개팅 상대. “더 맛있는 거 먹게 해 줄게, 내가.”이 이상 이 남자랑 엮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정말 잘 알고 있는데…. 왜 한없이 흔들릴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도망쳐 온 이곳이 낙원인 줄 알았어.” 자신을 정부로 삼으려던 프레스턴의 왕에게서 달아나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도망친 그곳에서 기다리는 건 또 다른 불행이었다. 14년 전 살려 보냈던 그 남자는 비비안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삶과 죽음을 빼앗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제 모든 것이 짓밟혔을 때. 이번엔 그 남자에게서 도망쳤다.  비비안은 기도했다. 그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낙원일 거라고. 그러니 그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 “도망쳐 간 그곳이 낙원인 줄 알았어?” 지나쳐 온 모든 길에 에벨라인이 있었다. 에드윈 베이트네스의 이름을 채운 것도 오로지 에벨라인이었다. 에벨라인의 목을 조르고 숨을 빼앗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탐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도망쳤다. 에드윈은 기도했다. 그 여자의 마지막 낙원을 뺏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면 도망칠 구실까지 박탈시켜, 평생 제 곁에 묶어둘 수 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