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목에 가득한 비릿한 냄새와 잔뜩 갈라져 악을 쓰는 목소리, 하늘을 가득 물들인 노을.모든 것이 붉디붉은 날은 바람에서마저 혈향이 돌았다.“사랑해, 녹스.”저를 경멸하는 이 눈빛에 미치도록 갈증이 인다.“그러니, 부디 기대해 주길 바라.”내가 다시 돌아올 그 날을 말이야.***모두가 사랑하는 여주인공의 최대 적수,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악녀 릴리스 크레센트에게 빙의했다.그리고 원작의 주인공들과 얽혀 죽은 것만 세 번.지금 생은 가까스로 얻은 마지막 기회다.목표는 오로지 하나. 반복되는 데드 엔딩을 피해 무사히 살아남는 것!그러려면 모든 사건의 주범인 주인공들을 피해 다녀야 한다.그러나……“릴리, 이 세상에 감히 너를 억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공녀님께선 오늘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저, 그리고 공녀님께 실례만 안 된다면……. 친구가 되고 싶어요.”망할 주인공들이 이젠 도리어 그녀를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그것으로도 모자라 늘 끝까지 그녀를 죽이려고 들던 유일한 친구마저도 이상한 말을 하는데.“네 마차라면 다 돌려보냈어.”“……왜?”“너랑 같이 가려고.”…주인공 모두와 잘 지내며, 행복하게 살아남을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제국의 악녀였다. 오라비에게 휘둘려 사람을 죽이던 끔찍한 삶. 쫓기고 쫓기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 나는 과거로 회귀했다. 어차피 한 번 죽었던 인생,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를 한 번 죽였던 남자와 손을 잡았다. 그의 목적도 간파했다. 과정도 무난하다. 계획에 빈틈이란 없다. 이대로라면 순조롭기만 할 텐데. “내가 라티샤의 눈에 들고자 이 방법을 택했다면요?” 어째선가 그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나 외에는 흥미조차 없어 보였다. 분명 그를 선택한 건 나였는데. 돌아보니 내가 그에게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어떤가요. 이제 나 없이는 살지 못하겠던가요?” 분명 푸르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깜깜한 심해가 되어. 전신을 집어삼킬 듯이 굴었다. “내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라티샤.” 여태 보아 온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뾰족한 덫 앞에서 아름답게 웃었다. 모든 미래가 내가 아는 과거고, 세상의 흐름은 내 손안에 있는데. 어째서 당신만은 왜,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