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빙의했다. 아니, 내 모습 그대로 떨어졌다.철저한 제3자로 주인공들의 옆에서 소설의 결말까지 함께 맞이했다.그게 벌써 수백 년.주인공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자신은 괴물이 되어 여전히 살아 있다.이 세계의 이방인으로 소설이 끝남과 동시에 내 시간의 흐름도 멈춰 버린 것이다.그러다 겨우 실마리를 찾았다.이 시간을 완전히 끊어 내 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그렇게 단서를 쫓아 황실의 시녀로 잠입했다.그런데, 넌 혹시……?“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아직도 작은지, 아닌지.”일렁이는 뜨거운 모닥불 때문인지,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딱 봐도 큰데 대체 뭘 확인하라는 걸까.“……이름, 불러 줘요. 헤스티아.”애처로우면서 진득한 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어서.”원하는 답을 들은 후에야 그는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저희 함께 밤도 보낸 사이잖아요.”아득한 춤을 추며 일렁이는 촛불처럼 그의 낮은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그의 모습에서 더는, 내가 주웠던 작은 소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생은 부디 네 소원을 이루길 바라.” 수상한 사람에게서 더 수상한 책을 받았다. 여자 주인공에게 버림받은 후, 광증에 사로잡힌 황태자가 제국을 멸망시키는 결말이라니. 현실을 기반한 허무맹랑한 삼류 소설. 딱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세계의 파멸을 막아달라는 신의 안배일까, 너는 곧 죽을 테니 발악을 해보라는 악마의 농간일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책의 내용대로 현실이 흘러간다. 책의 내용이 현실이라면 제국은 곧, 파멸한다.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함을 바라던 클라리체는 결말을 바꾸기 위해 특별한 한 발을 내디딘다. “아아. 너구나. 거슬리는 쥐새끼가?” 섬뜩한 붉은 눈이 클라리체를 옭아맸다. “하찮은 쥐새끼에게 내 목줄을 좀 맡겨볼까 하는데. 어때? 감당할 수 있겠어?” 사르르 이는 바람에 그의 결 좋은 머리칼이 흐드러졌다. 잔혹하고 무서운 말소리가 아니었다면, 클라리체는 냉큼 그의 손을 맞잡았을지도 몰랐다. “사, 살려주세요!” 그러나 지금 클라리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몇 번째인지 모르는 애원을 되새기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세상의 멸망을 막으려다, 내가 먼저 망하게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