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로 다 읽지도 못한 소설에 빙의했다. 제국의 공작인 킬베르크가의 하녀로 들어온 지 하루 만에 빙의가 됐지만 하녀라는 직책은 조연 중의 조연. 쉽게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해 안도했는데 이 하녀에게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봄날의 꽃잎만큼 은은한 연보랏빛 눈동자, 달빛이 부서질 때마다 은은하게 드러나는 은발까지. 조연이라기엔 보통의 외모가 아닌 이 하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난 뒤부터 모든 게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데……. * * * “걱정 마. 다프네. 내가 너를 찾으러 왔으니까.” 밤하늘보다 더 짙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타난 남자는 다프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프네는 다치고 쓰라려 피딱지가 엉겨 붙은 제 손을 그에게 내밀지 않았다. “아니요, 돌아가세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저를 찾지 마세요.” “아니.” 남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서릿발 같은 서늘한 눈을 한 남자는 다프네에게 명령했다. “돌아와라, 다프네. 나는 한 번 놓친 사람을 두 번 다시 놓치지는 않아.”
“공작을 살해하려던 여자래.” “결혼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었다던데?” 소란스러운 거짓말들을 들으며 리엘은 교수대 앞에 도착했다. 병사들은 리엘에게 수레에서 내려오라 소리를 질렀고, 리엘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땅에 내디뎠다. 교수대 위로 올라가라며 등을 떠미는 병사들의 손길은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밀쳐지면 밀쳐지는 대로 리엘은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새 갈라진 발바닥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죄인 리엘 티그리스는 베르타 노빌리스 공작의 아들인 테오 노빌리스와 결혼하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어 베르타 노빌리스 공작을 살해하려 하였으므로 이에 교수형에 처한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리엘은 죄를 고하는 베로카 후작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베로카 후작은 헛웃음만 흘리는 리엘을 쳐다보고는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인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하라.” “….” 리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을 지킨 그녀가 쉬어 빠지긴 하였으나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입술 밖에 내었다. “저 리엘 티그리스는 무죄를 주장합니다.” 리엘의 가벼운 몸은 아래로 추락했다. 줄에 매달린 채 떨어진 가벼운 한 영애의 손에서 들린 검이 이윽고 힘없이 떨어졌다. 하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반대편 손에는 피가 묻은 목걸이가 들려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