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어줄 수는 없는 건가?” 항상 무심했던 눈이 내 의견을 묻듯이 지긋하게 맞춰왔다. 아련하면서 촉촉하게 물든 금안이 사직서를 내고 도망치려고 했던 내 정신을 옭아맸다. * 악착같이 노력해서 황제의 비서가 되었다. 큰 봉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었는데. 문제는 황제가 소설 속의 사람을 죽이는 폭군황제라는 것이었다. 초점 없이 풀린 황제의 동공에 오싹한 소름이 피부에 돋고 앞일이 예상 갔다. 스릉-. 역시나. 나는 검을 뽑는 황제를 향해 살기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뛰어들었다. “폐하, 죽이면 안 돼요!” 젠장. 봉급이 많으면 뭐해, 이렇게 말리다가 내 목이 날아갈 것 같은데! 살고 싶어, 제발 비서 그만 둘래!
“우쭈쭈, 이리 와? 착하지이?” 동물을 너무 좋아하지만, 모든 동물을 쫓아내는 특이 체질을 가진 지은. 그녀는 강아지를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뒤 자신과 반대 체질을 가진 세이나의 몸에 빙의한다. “크르르르.” “아니야. 나 여자주인공은 아니어도 착한 사람이에요. 이쁜아, 이리 와아. 털 한 번만, 꼬리 한 번만…!” 세이나의 능력을 살려 제국 유일의 동물 조련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는 자신이 수인 남주가 있는 소설에 빙의했단 사실을 깨닫고, 맹수인 남주의 곁에서 흑심을 채우려 하는데. 우연히 세이나의 다른 능력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능력을 탐낸 많은 사람과 주변 국가들이 세이나를 사로잡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하고. “내 주인이니까 다 꺼져.” 츤츤거리던 남주인공은 세이나를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다.
코튼은 10년 전부터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식을 치른 다음 날, 남편이 돌변했다. “천한 놈과 뒹굴며 살더니 교양 수준도 바닥이 나버렸나 보군.”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아 풀어보려 했지만 냉대만이 있을 뿐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코튼은 생이 다해가는 꽃처럼 시들어갔다. 그런 그녀를 신이 안타깝게 여긴 듯 어느 날 기적적으로 기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은 르네디아이고, 남편인 릭턴은 그녀의 과거 연인이자 약혼자였던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었음에도 똑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니, 운명이 아닐까. 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나 보다. 그에게 버려지고 짓이겨지고, 밟히고 찢겼다. 몇 번이고 마음을 주워 담았으나, 버리기 직전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심장은 이제 그가 주는 상처가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한 마디만 우러나왔다. 떠올리지 말 걸 그랬어. 그럼 이토록 절망스럽진 않을 텐데. “당신을 기억한 걸 후회해요.” 르네디아는 곪아 터질 때까지 참고 참아왔던 마음을 뱉었다. 그에게 보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등을 돌리고 도망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