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이 가진 거 말 안 했냐니까.” 아이를 낳으면 그의 마음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사랑을 구걸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서 새아는 침묵했었다. 정략결혼 상대지만, 그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라도 되기를. 그런 애틋한 바람은 두 번의 유산으로 끊어졌다. 그리고 사랑이라 믿었던 남편이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말한 이혼. “……우리 이혼하자.” 그런 그가, 1년 만에 다시 나타나 새아를 뒤흔든다. *** “이혼하자고 해서 해줬잖아요.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새아는 소리를 지른 뒤, 깨달았다는 듯 단추를 풀어나갔다. “……너 뭐 하는 거야.”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었어요?” 수렁의 한가운데 서서 우혁은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야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고 한들. 새아에게 자신은 여전히 과거에 고여 있다. 그딴 자신은 새아한테 나쁜 놈 취급 당해야 하는 게 맞다. “어차피 쓰레기 된 거, 그래. 가보자, 끝까지.” 어쩌겠어, 내가 너 없이는 안 되겠는데.
불행이 끌어다 놓은 사이. 그들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선 윤해서가 필요했다. 여자의 화상 자국 뒤에 숨겨진 비밀.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문서후는 윤해서를 자신의 궤로 들였다. “일부러 저를 집에 들이신 거죠.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시간 낭비 안 하고 좋았을 텐데요.” 서후의 시선이 해서의 맨몸을 느릿하게 훑으며 올라왔다. “윤해서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윤해서랑 잠을 자고 싶었으면 진작에 해치우고도 남았다는 거야.” 열락에 뒤틀린 눈과는 달리 해서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다 벗어 던진 옷을 다시 태연하게 입혀 주는 서후의 손을 가로막으며, 해서가 물었다. “상무님이 이러려고 절 데려오신 게 아니면 도대체 이유가 뭔데요?” “말했지 않나? 당신이 괜찮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소리 내며 가슴을 치고 울었으면 한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음을 쏟아 내며, 네게 얽힌 모든 것을 털어내 주길 바란다. “무너져요. 있는 힘껏.” 그래야 윤해서 네가, 네 속에 있는 비밀을 토해 내지. 그 비밀을 토해서, 부디 나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를. 모든 걸 게워 낸 그 끝에서, 너도 나처럼 지겹게 내 생각만 해 보기를. 비밀보다 더 컸던 열락. 그 열락이 끌고 온 잔인하고도 뜨거운 인연들의 이야기, <열락의 끝>
코트 위에서 도산하는 그 누구보다 찬란했다. 배구계 유망주라는 소문답게 한껏 날아올라 시원하게 공을 때리는 모습은 재경의 마음에도 세게 부딪혀 오래도록 자국을 남겼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 역시 배구임을 알았을 때, 재경의 속에서 비틀린 욕심이 피어났다. 미숙한 풋사랑이 불러온 철모르는 선택은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던 마음을 단숨에 뒤틀어 버렸다. “선배를 도박 경기에 넣겠다면서, 사모님들까지 데리고 온다고 했어요.” “아깝네. 배구하면서 빚도 갚고, 사모님들 가랑이도 빨 수 있었는데.” 산하가 낮게 읊조리며 재경의 입술 바로 앞에서 말을 이었다. “그 좋은 기회를 또 심재경 양께서 도려 가셨어. 맞죠?” 재경은 더 깊이 파고들려는 산하를 확 밀쳤다. “이거 말고는 없어요. 선배 이제 갈 곳도 없잖아요.” “심재경.” “선배 그러니까 이제 배구 못 해요.” 이런 말로밖에는 남자를 잡을 구실이 생각나지 않았다 증오를 이용해서라도 그를 묶어 놔야만 했다. “그러니까 내 옆에서 날 죽을 만큼 미워해 봐요.” 산하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아 너무나 깨끗하고 섬뜩했다. 그 안에 부디 원망이 타오르길 바라며, 재경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말했다. “도 기사님, 오늘부터 밤에 문 잠그지 마세요.” 여자의 욕심과 남자의 배신감이 맞닿은 순간, 서로의 첫사랑은 이내 무뢰한이 된다.
“제법 대단하고 제법 무례한 내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협조합시다, 이보영 아나운서.” 약혼자의 외도 현장을 잡기 위해 보랏빛 새벽을 지새우던 보영. 우연히 이를 같이 목격하게 된 시열에게 덜미를 잡힌 이후로 그의 무례함과 오만불손함이 묻은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게 된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송시열 씨 요구,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네, 원하신다면 뺨이라도 맞아 드릴 테니깐.” 시열의 잘빠진 턱선이, 공기를 짓누르는 낮은 시선이, 기어이 보영의 경계를 넘어왔다. “바람피우죠, 우리.” 맞바람, 제안하는 겁니다. 지금. * * * 전부 무용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도 안다. 더 나아가면 발목이 꺾이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도. 하나 보영은 멈추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미 죽어 버린 엄마를 놓아주는 법도, 그녀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복수를 해 보겠답시고 사랑하지도 않는 약혼자를 붙들고 있는 것도. 휭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의지할 거라곤 붙잡고 있는 시열의 옷깃뿐, 보영에겐 그게 전부였다. “떨어질 것 같으면, 날 잡아.” 시열의 목소리에 보영은 애써 붙들고 있던 위험한 균형을 놓았다. 더 세게. 더 깊게. 더 짙게. 날 흔들어 줘. 방향을 잃어버린 내가 당신이 흔드는 대로 휩쓸려 갈 수 있도록. 거센 파고로 다가와 나를 덮쳐 줘. 벚꽃 잎이 시리게 휘날리던 어느 봄날. 부드러운 왼손 위로 맞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