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운
백고운
평균평점
자택 비서

“임신했다고. 그것도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재혁의 서늘한 눈빛이 소윤의 배를 훑었다. “넌 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주제에 다른 남자?” “착각이었어요.” “뭐?”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한 거예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어린 시절, 동화 속의 성처럼 거대한 저택에서 만난 재혁은 왕자님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첫사랑은 길고 긴 짝사랑이 되어 소윤을 괴롭혔다. 한재혁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니 이만 끝내요. 우리 관계.” “…….” “한재혁 전무님.” 그렇게 소윤이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찰나였다. 재혁은 그대로 소윤을 벽에 밀쳤다.  “뭐 하는 거예요?” “괜찮아. 네 경박한 행동 따위, 한 번은 눈감아 줄 테니까. 물론 마지막일 테지만.” 입술이 닿기 직전, 재혁이 소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나한테서 달아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평생.”

아내 파업

“이 여자가 낳을 아이를 우리 아이로 키울 생각이야.” 태연한 주한의 선언에 승아는 멈칫했다. 쇼윈도 부부로 지낸 지 3년. 사랑 없는 정략결혼의 끝은 예정된 이혼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아버지의 내연녀가 낳을 아이를 제 아이로 키우라니. 무심한 주한의 모습에 실망한 승아는 그에게 하룻밤 제안을 하는데……. “나랑 자요.” “손만 잡고 자자는 건 아닐 테고.” “맞아요, 하자고요. 아이를 갖기 위해서가 아닌…….” “…….” “쾌락만을 위한 관계를 원해요.” 그렇게 시작된 남편과의 첫날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쾌락만을 위한 행위에 심취하게 된다. “네가 가르쳐 줬잖아. 더 좋은 거.” “흐읏……!” “그럼 책임져야지.”

탐욕스런 상사

“호텔 침대에서 뒹구는 게 공적인 업무는 아니긴 하지. 이제 우리 관계도 마찬가지야.” 성한전자 차강준 부사장의 수행 비서인 윤서영은 그의 형으로부터 위험한 제안을 받는다. 어머니의 병원비가 필요했던 서영은 잠깐 흔들리지만 이내 포기한다. 강준은 그녀의 상사이자 짝사랑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다음 날, 강준은 서영을 호텔 스위트룸으로 불러들이고……. “아무도 안 올 거야. 여기로 부른 건 윤 비서뿐이거든.” “네?” “윤 비서는 내 은밀한 사생활이 필요하고. 여기에 있는 건 우리 둘뿐이니까.” 가운을 걸친 그가 서영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듣기 좋은 저음이 서영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아찔한 예감을 빚어냈다. “야한 짓을 하든, 미친 짓을 하든 둘이 해야 한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그렇게 간절한 거면 네 몸으로 직접 만들어 봐.”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진 강준의 입술에서는 터무니없는 도발이 흘러나왔다. “예를 들면, 수행 비서와의 난잡한 스캔들 같은?” 치명적인 오해로 시작된 상사와의 밤. 그것은 더없이 탐욕스러웠다.

오빠 남편

“별거 아니잖아요. 부부 사이에 잠자리는.” “한예서.” “왜요. 내가 이런 말 하니까 어색해요?” 오늘, 아내를 졸업하기로 했다.  이 결혼은 시작부터 가짜였고, 서지헌은 그저 한예서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을 뿐이니까. 그에게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한순간도. “오빠 말이 맞았어요. 결혼하든, 밤을 보내든 오빠한테 난 여자일 수 없다는 거. 이제 인정할게요.” “…….” “이혼해요, 우리.” 오래도록 간직해 왔던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결말은 이혼이었다. 하지만 지헌은 예서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뭐 하는 거예요? 다 끝났다잖아요.” “고작 이딴 종이 하나로 뭘 하겠다는 건데.” 지헌의 서늘한 눈빛에 이어 이혼 서류가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예서를 벽에 밀어붙인 지헌은 마치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조금도 달아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지금부터 진짜 부부다운 짓, 해 보자고.”

남편은 모르는 임신

“아이가 널 많이 닮았어.” “네?” “생김새도 그렇고, 특히 눈매가.” 정혁의 낮은 목소리에 은채는 숨을 삼켰다. 무감한 표정과는 달리 귓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당연하잖아요. 내가 낳은 아이니까.” “그럼 나머지 반은 그 자식을 닮은 건가? 나 몰래 놀아났다던 그놈 말이야.” 오해로 점철된 이혼 사유는 결코 밝혀져서는 안 될 진실을 덮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고 이제 와서 말한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하지만 그러기에 6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아이에는 전혀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요?” “맞아, 그런데 문득 신기하더라고. 날 닮은 존재라는 게.” “…….” “만약 너와 나 사이에서도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고작 2년도 못 갈 사랑 운운하면서 이혼해 달라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무의미한 대화라는 듯 정혁은 은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손끝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남편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아이가 그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야생성

“역시, 난 널 가져야겠어.” 8년 만에 재회한 첫 남자에게서 전해지는 것은 순수한 사랑도, 애틋한 마음도 아닌, 그저 잦아들어야 할 때를 놓쳐 버린 불꽃 같은 집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구 마음대로?” “변했네, 이세림. 귀찮으니까 떨어지라고 해도 그렇게 쫓아다녔던 주제에.” 서늘한 조소와 함께 다가오는 강재의 손길에 세림은 숨을 삼켰다. “잘 숨어서 평생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지 그랬어. ……내 손으로 직접 널 끊어 내 줬을 때.” 집어삼킬 듯이 가까워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선언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미쳤어, 넌…….” “맞아, 너한테 미쳐 있어. 처음부터 줄곧.” “…….” “어쩌면, 영원히.” 길들지 않은 야수 같은 눈동자가 검게 번득였다.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러게 꿍꿍이를 숨긴 놈이 부를 때는 어떻게든 오지 말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