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비위 살살 맞춰준 게 뒤통수를 후리려고 그런 건가?” 백승휘의 눈동자가 붉게 튀었다. “하마터면 결혼식장에서 소박맞고 궁상떨 뻔했네.”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피할 방법은 하나였다. 순순히 따르는 척하다가 결혼식 전날 도망치는 것.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들켜버렸다. 그것도 남편이 될, 백승휘에게.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까 정말 귀여운 짓을 다 하네.”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 얼굴에 시선이 닿는 몇 초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정서연 씨. 도망갈 수 있으면 가 봐.” 오만한 눈동자가 말했다. 그게 어디 네 맘대로 될 것 같냐고.
어두운 밤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극야. 윤주에게 삶은 극야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작정한 듯 어둠만 보였다. 그래서 찾은 태양, 유정한.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가까이 가면 그 열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게 분명해서 마음을 접었는데. “서영우 실장이랑 헤어졌으면 하는데.” “…….” “아, 그리고 나랑 결혼도 하고.” “저한테 왜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서영우가 날 배신했거든. 그래서 되갚아 주려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가 다가왔다. 불순한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면서. “짚고 서야지.” “…….” “치마 올리고.” 다시 또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