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회색빛으로 뒤덮인 도시. 그보다 더 잿빛으로 물든 눈으로 도심을 내려다보며 서윤은 생각했다. 끝도 없는 이 진창의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최고의 결말이 아닐까, 하고. 현시대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환생, 세계가 사랑하는 손을 가진 여자, 그리고 ‘하성그룹’의 유일무이한 천덕꾸러기. 이 모든 수식어가 붙은 한 사람, 차서윤.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의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나강현’이라는 불청객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정말 저랑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못할 것도 없죠.” 집안끼리 묶인 정략결혼 상대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도 거절할 줄 알고 나온 자리였으니까. “우리가 연극만 잘하면 넉넉히 삼 개월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강현이 내민 달콤한 제안에 그와 한배를 탔다. 위장 연애라는 무대 위 배우는 단 두 사람, 나강현과 차서윤이었다. “벌려요. 제대로 보여줘야지.” 사람들을 등지고 서 있던 강현은 오롯이 서윤만 볼 수 있게 싱긋 웃어 보였다. 주문 같은 것이었을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순식간에 밀려들었고, 그렇게 남들 앞에서 보란 듯이 진짜 연인들이나 할 법한 키스를 나눴다. 모두를 속이기 위해 시작한 연기는 어느 순간부터 진짜인지, 연기인지도 모를 만큼 미묘한 아슬함을 품었고. “우리 이제 그만해요, 이 연극.” 서윤은 이내 강현에게 연극의 끝을 알렸다. “결혼할까요, 우리?” 그리고 동시에 강현을 향해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이번에는 그가 서윤에게 답을 줘야 할 때였다. “그러죠.” 결핍이든, 사랑이든. 또는 복수라는 이기적인 감정의 수단이든. 우리는 새로운 연극을 시작했다. 이 무대를 진짜로 만들기로.
“이름이 강태준, 이었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정확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해강입니다.” “나는 꼭,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태준의 그 한마디에 해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하는지 보자고.” 다시 만난 그녀를 잡고 싶은 남자, 강태준. “철저하게,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거야.” 다시 만난 그를 밀어내려는 여자, 도해강. “내가 왜, 싫은데?” “재벌, 이시잖아요.” 단 하루 일탈이었을 뿐인데, 이렇게 엮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재벌인 남자의 곁에서 <재벌 연인>으로 살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해강은, 철저하게 그의 손길을 외면하고 싶었다. 물론 제 뜻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첫 순간을…… 잃었는데,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빌어먹을. 몇 시간 전. “조각상이 움직이네?” 첫 만남부터 이상했다. “뭐야, 조각상이 아니잖아?” 자신을 조각상으로 착각하던 엉뚱한 여자. 반짝이는 눈동자가 유난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미소 짓게 하는 유쾌함에 매료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전개를 바란 건 아니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당신이…….” “……기억, 안 나요?” “납니다……, 어렴풋이.” 늘 완벽함만을 추구하던 이준의 입에서 다소 애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 인생에 이런 실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했었는데. 그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차가운 물줄기가 쭉 뻗은 장신 위로 쉼 없이 흘러내렸다. 이준은 제 몸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과열된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그러나 울컥 치미는 짜증에 얼굴을 뭉개버렸다. 첫 순간을…… 잃었는데,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