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그려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손을 주셔야 기억을 읽지요.” 피의 여인, 혈비의 저주로 물든 비운의 나라 연주국. 사람들의 기억을 그려주며 살던 설하는 누가 봐도 고귀한 신분인 류서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고 말았다. 달갑지 않은 표정인 그에게 설하는 기억을 읽는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일 뿐. 그러한 류서의 노골적인 조롱은 설하를 전의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보란 듯이 기억을 읽어내서 이 오만한 도령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설하는 굳은 결심을 했다. 하지만 그와 맞잡은 손을 타고 설하에게 흘러온 것은 분명 이 나라 왕의 기억…. “어… 어찌….” 어찌 이 도령이 왕인 것이야? 이 나라, 연주국의 왕이 왜 이런 곳에…. 설하의 떨리는 몸이 류서의 앞에서 뒤늦게 납작 엎드러졌다. 그러나 왕인 류서가 그녀에게 원한 것은… “너는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뱉어진 류서의 단호한 말. 전하는 제게 무엇을 원하시며, 왜 저를 곁에 두시려는 겝니까?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설하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녀에겐 우선, 꼭 해내야만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끝내 감추어진 류서의 진심, ‘너는 내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이냐? 그동안 나를 그리워하지도 않았어?’ 용기 내어 묻지 못하는 왕의 마음은 속절없이 타들어만 간다.
남녀유별. 남자와 여자의 일이 엄연히 구별된 조선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양반가 규수가 있다. 조신해야 할 규수의 몸으로 여러 도령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유명한 스승, 원지안. 어쩌다 보니 그녀의 제자가 된 한양 최고 한량, 안윤 도령. 지독히 얽힌 두 사람의 위태로운 수업이 시작된다. *** “도련님, 한 선비님이 도련님과 이야기 나누기를 청하십니다. 여인만으로는 적적하실 것 같다고 도련님의 좋은 말동무가 되어드린다는데, 안으로 뫼셔도 될지요?” “선비라면 나쁠 것 없지. 안으로 들여.”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컥, 방문이 열리고 큰 갓을 눌러 쓴 한 선비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내들에 비해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는 기모가 새 술상을 들여오는 동안 앉지도 않고 꼿꼿이 서 있더니 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양 최고 한량은 대체 어떻게 노나 궁금해서 와 봤는데, 여인도 없이 이리 혼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순간 윤이 흠칫하여 선비의 얼굴을 다시금 쳐다봤다. ‘행색은 분명히 사내인데, 목소리는 어찌 여인의 것처럼···.’ “남의 술자리에 끼어들었으면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나? 어디 사는 누구인지, 그것부터 밝혀.” 선비에 대한 궁금증에 윤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선비는 무언가 망설이듯 머뭇대더니 이내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박문식.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꽤 흔한 이름이지요? 후후.” 박문식. 그건 지금 기방 앞에서 지안을 기다리는 사내종의 이름이었다. 조금 미안하지만 지안은 사내종 문식의 이름을 잠시 동안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자리에서 곧 윤과 본격적인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아주 잠시 동안만. *** 서로를 놓지도, 그렇다고 더 다가가지도 못하는 비밀 많은 스승과 까칠한 제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