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
블루밍
평균평점
결혼의 절정

“뭘 그렇게 두려워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 그런 거 아녜요.” “또 좀 잡아먹으면 어때? 부부 사이에.” “장난치지 말아요.” 이헌은 허리를 숙여 서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워. 그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서정은 그에게 미칠 듯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걱정이 됐다. 아마 얼굴은 심장보다 더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이게 다 깊고 그윽한 눈매와 늘 여유를 머금고 있는 얼굴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너무 가까이 맞닿아 있는 허벅지 때문이다. “지금 얼굴이 빨간데 좋아서야, 아니면 그 정도로 내가 싫은 건가?” “더워서 그래요.”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 “사실이에요.” 조금 전부터 그의 뜨거운 열기가 천을 뚫고 서정에게까지 전해졌다. 일부러 의도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은 복잡해질 뿐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 그가 아니었던가. 서정이 허벅지에 느껴지는 단단한 물건에 정신이 나간 사이, 그가 느슨하게 입을 뗐다. “지금처럼, 겉보기에 그럴싸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건 어때? 만족스러운가?” “그 부분에 있어선 이헌 씨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명예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아버지가 이헌이 아니었다면 결혼을 허락했을 리 없다. 이헌이 결혼을 제의했고 그 덕분에 영위하는 지금의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어쩌나. 갈수록 압박이 심해질 거야. 아이에 대해서든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든.” “…….” “앞으로 2년, 할 수 있는 데까지 잘 버텨 봐.” “고, 고마워요.” 내내 그의 발치만 바라보던 서정이 고개를 들어 이헌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했다는 듯.

이런 꽃 같은 결혼

“그 애가, 내 애는 맞나?” “……당신 아이 아니에요.” “뭐?” 사랑 따위 시간 낭비라고 말했던 남자. 결혼은 장사라고 말했던 설태주가 맹렬하면서도 싸늘하게 서희를 응시했다. 미련하게 질질 끌었던 오랜 짝사랑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내가 여태 우서희 몸속에 뿌려 놓은 씨만 해도 상당한데 꽤 단정적으로 말하네. 기분 더럽게.” “이미 말씀드렸듯 전무님 아이가 아닙니다.” “해야겠네. 결혼.” 남자의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 꼭 거짓말하는 사람 같아서.”

물거품

“제 조건은 이래요. 결혼만 하면 차윤도 씨가 바람을 피우던, 뭘 하던 일절 터치 안 해요.” “첫 만남에 결혼이라…….” 눈두덩이를 문지르던 차윤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요구가 선행된다면.” 호텔을 향해 턱짓하는 그의 노골적인 몸짓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만큼 세아는 순진하지 않았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운전해 올 때만 해도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까? 아니, 세아는 올 수밖에 없었다. 절박한 사정이 그녀를 내몰았을 테니. “첫 만남에 예의가 없으시네요.” “나와 결혼하고 싶다면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 “침대에선 더 예의가 없는 편이라.” 그는 분명 그를 찾아온 수많은 여자를 이런 식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조건에 안달 난 여자 취급을 하며. 이건 도박이다.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준다고 해서 자신의 목적인 결혼을 이룰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최악의 경우, 결혼은커녕 하룻밤 가지고 놀다가 버려질 수도 있다. “차윤도 씨.” “말해요.” 지금 세아에겐 자존심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당신이 버린 예의, 나라고 차릴 이유가 없겠네요. 우리 가죠.”

이혼 번복

“내 아이를 낳아.” 숨이 턱 막혔다. 잘못 들은 건가? 서연은 크게 벌어진 눈으로 우원을 응시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눈꺼풀을 감는 법도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어.” 우원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수억의 빚을 갚아 준 사람이기는 해도, 헤어진 전남편의 아이를 가지는 건 서연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머리는 시릴 정도로 아주 맑아.” 서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를 보고 있던 우원의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갔다. 항상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잔뜩 웅크려 있는 저와 달리, 우원은 여전히 우위를 점한 사람 특유의 도도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저와 잠자리를 갖겠다는 거예요? 아이를 위해서?” “그게 어려운 일인가?” “대체…… 왜요? 우린 잠자리 한 번 없는 부부였는데.” 제겐 품에 안고 싶은 매력이 전혀 없다고까지 했었으면서. 우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대답하기 곤란하다기보다는 설명해야 하는 귀찮음이 더 커 보였다. 이혼한 지 2년. 오만한 정우원이, 완벽한 삶에 유일한 오점을 남긴 날 찾아왔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 달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