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했던 말은……." 수현이 머뭇대던 말을 끝까지 다 듣는 순간 심장의 근육이 미세하게 아릿했다. “잘 맞는 비즈니스 파트너. 그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난.” 따갑게 쏟아지는 단문은 실의를 가지고 왔다. 인영은 성숙한 척 숨을 참았다. 그 말은 경고였다. *** “발칙하네, 이인영.” 깊숙한 곳에서 뛰놀던 그의 조종대로 인영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거나 싫은 게 아니라, 눈앞이 캄캄해져서 얼굴이 꾸밈없이 일그러졌다. 수현이 비틀린 그녀의 입매에 입을 맞추었다. “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아슬아슬한 이 선을, 결코 넘지 마. 그러나 잔혹하게도 이미 그에게 도취되어버렸다.
“자신 있게 말한 것치곤 체력이 영 저질이군.” 은혁이 시아의 여린 살가죽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달아오르는 도발이었다. “닥, 쳐.” “솔직하게 말해야지. 여기처럼.” 꿈틀거리던 그의 색욕이 다시 불타올랐다. 밤은 길었다. 본능에서 도래한 갈증이 그와 시아를 매몰차게 덮쳐왔다. *** 전(前) 검사 주시아는 그 하룻밤을 잊고 부지런히 살아갔다. 변호사 주시원으로서. “숨바꼭질을 제 발로 돌아와 끝냈군?” 원나잇 상대이자, 파헤쳐야 하는 용의자이자, 이 회사 임원이신 공은혁 전무. 찰나 감정은 생겨버렸고, 정체를 밝히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가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습습하지 않은 공기. 자그마치 10년이었다.고국의 가을을, 이 가을의 공기를 마셔보겠다고 보낸 시간이 그랬다. 여름은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해방감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그렇게 느려선 금방 붙잡히겠다.”세상의 조롱을 공기처럼 받아 마셨다.처음 품은 감정마저 부정 당한 그날부터, 오롯이 그녀의 편이었던 강이한.여름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여름은 열심히 튀어 올라오는 굴곡진 선에 눈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이한아.”“어.”“나 서준이 사랑해.”갑작스럽고도 황당한 고백이라, 평온하던 이한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여름은 미동 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태연한 척했지만, 이미 속은 헝클리고 할퀴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물기 담은 채 휘어졌다.“신하로 안 돌아가는 거랑은 별개의 감정이야.”널 사랑하더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 내가 거기까지 욕심내서는… 안 되는 거잖아.그런데 왜……“나는 너 안 좋아해,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해….”“그러게. 넌 나 안 좋아하는데.”이한은 꽉 잡은 손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쉽게 뿌리칠 수 있도록.“헷갈려, 너. 착각하게 만들어.”자꾸만 욕심이 나는지.이한아, 내가 널… 사랑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