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담
청화담
평균평점
그로 젖어드는 밤

“아이가 아빠를 필요로 하는 모양이지?” 성준은 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넌지시 물었다. 윤은 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래서, 다시는 성준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 결혼해. 너 말고 다른 여자랑.” 성준이 윤에게 냉혹한 이별을 건넸을 때, 윤의 배 속에는 이미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혼자지만 부족함 없는 사랑으로 키우고자 노력했는데……. “네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줘.” “하, 선배.” “너 하나만 보고 네 아이까지도 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아이 아빠가 자신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성준이 다시금 성큼 다가온다.

우아한 재회 (15세 이용가)

“재회한 소감이 어때?” “…….” “난 반가워서 미치겠는데.” 6년 전에 헤어진 옛 연인, 차태하를 클라이언트로 만났다. 해인은 기막힌 우연에 실소를 흘릴 뻔했다. 과연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당함에 사무적으로만 대하자, 삐딱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말없이 떠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그였다. 갖고 놀기 쉬운 여자라며. 해인은 그날 밤 일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상처받은 것처럼 굴면 안 되지.” 그런데도 차태하는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마치 그 홀로 실연의 아픔을 감내한 것처럼 보였다. “아까 재회한 소감 물으셨죠?” 정작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건 해인이었는데도. 아픈 과거를 상기한 해인이 천천히 내뱉었다. “최악이네요.” 예전처럼 그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불순한 거짓말

“오랜만이야, 당신.” 답지 않은 농익은 인사에 단은 파르르 떨었다. 그토록 잊고자 발악했던 전남편이었다. 상우그룹 며느리에서 촉망받는 디자이너가 된 서단. 그녀에게는 대기업의 막대한 지원이 필요했다. 지원을 받고자 나간 자리에 차준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작품이니까 돌려받아야지.” 서단은 차준원의 인생에 남은 유일한 오점이었다. 그랬기에 단은, 제 사랑을 지키고자 준원의 곁을 떠났다.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공들여 만들었거든. 내 손끝, 입술, 허리 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도록.” 잔인한 재회 속에서도 준원은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사랑하는 아내와 모처럼 시간을 갖는 사람처럼.

우아한 일탈

“구면이죠, 우리?” 작품의 소장자로 맞닥뜨린 최무혁은 조하윤을 가볍게 옭아맸다. 6년 전,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남자였다. 느긋한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작품으로 향했다. “고흐의 작품이네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낮게 잠긴 목소리는 그의 잘난 얼굴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또 론강 앞에서 만났네.” *** “작품을 대여해 주는 대신 뭘 받으면 좋을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조하윤 씨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혁은 태연하게 하윤을 바랐다. 실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다가 결혼 압박에 시달리는 그녀로서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제문 그룹 후계자와의 연애 그리고 미공개 작품. 하윤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굳이 정의하면 계약 연애 정도겠네요.” “…일탈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6년 전처럼.” 하윤의 말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혁이 6년 동안 잊지 못한 여자는 아를에서의 하룻밤을 일탈로만 여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무혁이 내세운 조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쪽이 편하다면 그렇게 합시다.” 거만한 입매에 여유로운 웃음이 묻어났다. 그와 동시에 하윤의 ‘우아한 일탈’이 시작되었다.

짐승의 속삭임

“원래 한 번 박히면 좀 깊게 박혀서.” 밀란의 상무 이사이자 유망한 국회 의원의 딸, 백유주. 완벽한 겉모습과 달리 시들어 가는 그녀에게, 권이석은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하기 싫으면 밀어 내셔도 됩니다.” 유주를 사랑에 빠뜨리는 것과 달리, 이석이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멈출 기회는 지금뿐이라.” 서 의원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어깨뼈 하나를 내어 주며 연극을 펼친 것뿐이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다. 권이석의 머리는 새까맸고, 은혜를 모르는 그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배만 불리고 빠지면 될 줄 알았는데, 허우적댈수록 더 깊은 곳까지 잠겨 들고 만다. 결핍된 인생에 백유주가 섞인 순간, 친부가 건넨 달콤한 와인은 독주가 되었다. 중독된 이석은 그녀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잔혹한 덫

“내가 뭐 하러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겠어.” 윤세준의 차디찬 한 마디에 정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배에 품은 아이를 지울 수 없었다. 그에게서 도망친 새벽, 아진은 부르지도 않은 배를 감싸며 다짐했다. 윤세준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눈물짓지도, 또 멍청하게 누군가를 사랑하여 제 모든 것을 내어주지도 않겠다고. * * * 5년 후. 한 저택의 가정부로 들어간 아진은 딸, 지율에게 사랑을 주며 키우는 것에 여념이 없다. 이제야 겨우 삶에 깃든 평온은 3개월 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사장님'에 의해 무너지고 마는데... “얼굴이나 좀 봅시다.” 아마 아진은 몇 시간 동안 대리석 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구둣발로 짓밟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랜만에.” 아진의 뒤에 선 남자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뒤태를 잊었을 리가.

구원의 대가

“용도를 다하지 못했으면 아양이라도 떨어.” 조소로 점철된 노골적인 힐난이 하림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날은 짝사랑한 남편에게 이혼을 말한 날이었다. 비좁은 배에 움튼 새 생명을 감춘 날이기도 했다. “내 것도 제대로 못 받아먹는 주제에 남의 것까지 탐내지 말고.” 연하림은 정윤겸의 아이를 품을 그릇에 불과했으니까. 남편은 그의 연인과 밀월여행을 떠날 테니까. 태양을 탐하려던 마음은 새까맣게 타 버렸고, 다 타 버린 첫정은 아픈 상처만 남겼다. 상처투성이가 된 하림은 저를 가두었던 새장을 벗어났다. 작은 불씨만 남긴 사랑과 재회할 줄도 모르고. “5년 만인가.” 닫힌 문을 응시하던 하림의 뒤로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천이 구겨지는 소리와 구두 밑창이 바닥에 닿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을 5년 만에 봤으면, 반가운 척 안기기라도 해야지.”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저음이 하림을 돌려세웠다. “너 하나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흉터처럼 남은 사랑을 도려내려 애쓴 시간이 자그마치 5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사랑에 다치지 않으려 쌓은 방파제는 윤겸의 한마디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던데, 그와는 지독한 악연이었다.

실낙원

“많이 컸네.” 뻣뻣하게 굳어 버린 윤영원은 피할 수도 없이 정사헌을 올려다보았다. 빛 한 점 담기지 않는 눈동자가 갸름한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처음 본 게 갓 스물이었는데… 지금은 스물일곱인가.” 나이를 헤아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린 눈길이 부어오른 뺨에 머물렀다. 응어리 진 감정이 그 안에서 요동치자, 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어린 티도 안 나고.” 애써 밟아 두었던 첫정이 잡초처럼 고개를 들려 했다. 이를 악문 영원은 사헌을 외면하려 목에 힘을 주었다. “저, 그동안 남자 친구도 있었어요. 연애도 여러 번 했고요.” 거짓을 자아내는 숨소리가 잘게 떨렸다. 갓 스물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 스물일곱은 모른 척을 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후원자의 아들과 후원을 받던 음대생. 강신그룹 경영권자와 피아노 학원 강사. 가뜩이나 평행선을 그리던 신분은 그 간극마저 넓어진 지 오래였다. 넘지 못할 선을 탐하며 첫사랑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지금까지로도 충분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달려들던 그때랑 달라요.” “잘됐네.” 탄내를 풍기는 손이 검은 상복에 다다랐다. 마른 몸이 돌려세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헌은 가냘픈 어깨를 감싸 쥐었다. 영원의 벌어진 옷깃 사이로 뽀얀 살결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스물일곱 살에, 그동안 만난 남자도 많으면.” 굵다란 손 마디가 그녀의 옷깃을 여미어 주었다. 눈 밑까지 발갛게 물들인 영원과 달리 사헌은 고약하리만치 담담했다. “적어도 전처럼 아프다고 울지는 않을 것 아냐.” 아버지의 묘 앞에서 그의 애첩을 욕망하는 아들도 있을까. 단단한 손끝이 검은 상복과 대조되는 연약한 목덜미를 뭉근하게 쓰다듬었다. “할 때마다 좁아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 짙은 눈에 이채가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