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처럼 살아왔다.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제 다시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시작이었다. “내 이름도 알고, 내가 오늘 여기 올 것도 알고…. 반우진 씨 또 뭐 알아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애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이내 다시 입매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입술을 뗐다. “설유화 씨… 장난 아니네. 진짜 탐난다.” 그가 무슨 저의로 접근해서 이따위 말을 하고 있는지 빨리 해석하고 싶었다. 동시에 이 불길한 상상이 단순한 해프닝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 나이 알아요?” “서른둘. 설유화 씨가 나 먹고 버렸을 때가 서른이었지. 난 이제 서른이에요.” 유화의 입에서 작게 탄식이 흘렀다. 질문에 틈 없이 대답하는 반우진의 목소리는 상냥했고, 태도는 당당함을 넘어서 뻔뻔함이 가득했다. 내용은… 더없이 자극적이다. “내 최근 거주지는 알아요?” “이천 여자교도소.” “그럼… 내가 거기 왜 들어갔는지도 알겠네요?” “세력에 협조. 그 방면으로 꽤나 능력 있다고 들었어요.” 이거였다. 단단한 반우진의 목소리에 감이 잡혔다. “혹시 날 찾은 이유가 그 능력과 관계있나요?” “음…….” 질문과 동시에 즉각적인 대답을 내놓던 반우진이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반우진이 손을 뻗어 유화가 주문한 카타르시스를 집어 들었다. 그 독한 술을 음료수 마시듯 꿀꺽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잔에서 입술을 뗐다. 잔을 내려놓은 반우진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맞아요. 난 능력 있는 선수가 필요하거든요.” 세상은 왜 나를 가만두지를 않냐며 한탄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취해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그들처럼. 그저 욕망에 초점을 맞춰 상대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미련하게 혼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선수가 되기로 했다.
자살한 여배우의 숨겨진 딸, 우성 그룹의 혼외자. 그리고 재벌가 납치 사건의 피해자. 이 모든 건 서안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우성 그룹의 도구로서의 마지막 쓸모를 위해 나간 맞선자리. 굴지의 그룹, 글린트의 장손인 반도원을 기다렸지만, 그곳엔 자신을 스토킹 해 왔던 재벌가 망나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결혼이라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설득해야한다. 비록 그가 맞선이란 맞선은 다 파투 내고 다니는 남자라 할지라도. “반도원 씨, 정략결혼이 왜 싫어요?” “내 계획에 그런 결혼은 없습니다.” “로맨틱하셔라. 연애결혼이 꿈이셨나 봐요.” “알면 꿈 깹시다.” “딱 1년. 때가 되면 내가 조용히 떠나 줄게요. 그다음 당신과 연애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세요. 내 빈자리에, 대외적으로 아무 문제없도록.” 정략결혼이 싫다는 남자에게 제안한 ‘계약 결혼’. “난 손해 보고는 못 사는 성격입니다.” “뭘 원하시죠?” 그런데, 그가 바라는 조건이 범위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