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
성현
평균평점
부휴자 담론

<부휴자 담론> ≪부휴자 담론(浮休子談論)≫은 조선 초기 대표적인 문인 성현(成俔, 1439∼1504)의 저술이다. 현전하는 목판본과 필사본은 모두 6권 1책으로 각각 두 권씩 <아언(雅言)>, <우언(寓言)>, <보언(補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유형의 담론은 각각 다른 이야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담론의 주체도 <아언>은 부휴자이고, <우언>은 허구적인 인물이며, <보언>은 역사 인물이다. <아언>은 권1(18항목), 권2(22항목)에 40개 항목의 담론으로 구성되었다. ‘아언(雅言)’은 본래 ‘바른말’ 또는 ‘평소에 하는 말’이란 뜻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평소에 하던 말을 기록할 때 ‘자왈(子曰)’이라는 어구를 서두에 사용한 것같이 대부분의 이야기가 ‘부휴자왈(浮休子曰)’로 시작한다. 간혹 ‘유생문왈(柳生問曰)’, ‘동리선생문왈(東里先生問曰)’이라 해 문답식으로 전개된 담론도 눈에 띈다. 담론의 주체는 성현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부휴자(浮休子)’다. 여기에 실린 담론은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한 성현의 인식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성현의 정치관이 논리적으로 피력되어 있는데‚ ‘하늘[天]−임금[君]−신하[臣]-백성[民]’의 관계를 일관된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 성현 자신의 정치관을 성리학의 논리를 펴면서 직설적으로 피력한 글인데도 심각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좌전(左傳)≫이나 ≪장자(莊子)≫ 등 중국 고전에 나오는 옛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경구나 속담 등을 삽입해 구어(口語)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언>은 권3(17항목), 권4(20항목)에 37개 항목의 담론으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우언(寓言)’은 ‘우의(寓意)를 지닌 말’이란 뜻이다. ≪장자≫ <우언>편에서 그 전례를 살필 수 있다. 장자는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직설적인 담론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꾸미고 이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여기서의 <우언>에도 ‘부휴자’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허구로 설정된 다른 인물들의 상호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저산생(樗散生)’, ‘공동자(空同子)’, ‘동고자(東皐子)’, ‘녹비옹[鹿皮翁]’, ‘동구선생(東丘先生)’, ‘강상노인(江上老人)’ 등이 실제 인물처럼 등장한다. 배경이 중국 전국 시대로 설정되어 있지만, 등장인물이 그 시대의 역사적 인물은 아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이 허구임을 나타내어, ‘우언’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성현의 <우언>에서는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가 함께 등장해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구체적인 사례로 군왕의 실정, 가렴주구를 일삼는 권신을 우회적으로 풍자한다. 공훈이나 능력이 없으면서 높은 자리를 탐내는 자들을 공박하며, 권귀한 자들의 비윤리적인 삶을 질타하고 있다. <보언>은 권5(16항목), 권6(16항목)에 32개 항목의 담론으로 구성되었다. ‘보언(補言)’은 ‘보충한 말’이라는 뜻이다. 성현은 이 글에서 중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가필(加筆)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폈다. 구체적으로, ≪좌전(左傳)≫, ≪사기(史記)≫, ≪열녀전(烈女傳)≫ 등에서 역사적 사건을 사례로 취하고, 역사적 인물의 입을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담론을 개진하는 특정 인물이나 담론 자체는 실제 역사서에서 살필 수 없는 가공의 사실이다. <보언>은 주로 역사 인물의 입을 통해 군왕에게 간언을 올리는 내용의 담론이다. 사냥을 자주 나가는 초나라 장왕(莊王)에게는 번희(樊姬)가 그 병폐를 간언하고, 도성 밖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조나라의 숙후(肅侯)에게 대무오(大戊午)가 그 병폐를 간언한다. 또 잘못된 인사를 한 군왕에게도 간쟁하는 신하를 등장시킨다. 성현은 이 글을 통해 여러 가지 잘못된 정치적 상황에서 아랫사람들이 임금에게 어떻게 간언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wish 1권

억울하게 사형을 구형받은 유현. 곧바로 사형을 집행당하게 되는 그는 기적적으로 구해진다. 그를 구한 것은 강력 범죄자 특수 유치시설 이라는 Wish. Wish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유현은 천국과도 같은 환경에 놀란다. 그런 Wish의 생활에도 익숙해져 가는 그 때에. Wish의 실체가 점점 밝혀지는데...

원서발췌 허백당집

<원서발췌 허백당집> 조선 초기의 문신 성현(成俔)의 시문집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다. 이 책은 시집 14권, 보집 5권, 풍아록(風雅錄) 2권, 습유 1권, 문집 14권, 합 36권 8책의 방대한 분량 중 시(詩)·악부(樂賦)·기(記)·서(序)·논(論) 등 여러 형식의 글 67편을 정선한 것이다. 박은, 양사언 등을 비롯하여 ≪허백당집≫의 저자인 성현 등 조선 초기 문사들을 주로 연구해 온 필자의 세심한 번역이 돋보이는 저서다. 중종조에, 당대의 문사들의 글이 사장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던 그들의 글을 모아 관찬(官撰)으로 문집을 간행한다. 그때 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허백당집≫은 이후 소실과 중간을 반복하며 비서장본 등으로 이어지다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이조명현집(李朝名賢集)≫ 2집에 ≪부휴자 담론(浮休子談論)≫과 함께 영인하였다. 현재 알려진 가장 완벽한 판본으로 이를 저본으로 삼았다. 문학의 역량으로 강조한 ‘질서관의 확립’ 한국문학사에서 이색(李穡), 권근(權近), 서거정(徐居正) 등의 맥락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층 문인이다. 개국 초 문인들이 건국 사업에 주력했던 데 반해 그는 문학적 역량을 정치적·사회적 효용을 추구하는 데 기울였다. 그 실천적인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질서관의 확립’인데 이는 <사물은 함부로 합칠 수 없음을 논함(物不可而苟合論)>에서는 신분적 질서관을, <악학궤범서(樂學軌範序)>에서는 예약에 의한 질서관을 강조한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 ‘화(和)’라는 질서 속에 독자적 다양성과 개성을 강조했다. 다채롭고 풍부한 작품의 향연 성현의 문학은 다채롭고 풍부하다. 1천여 수에 달하는 시 작품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애민시(愛民詩)다. 중심이 되는 관료 문학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아울러 국속시(國俗詩)는 최치원(崔致遠), 이색의 뒤를 잇는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허백당집≫에 함께 수록된 ≪풍아록≫은 본래는 별도로 편집된 악부시집이었다. 창작의 예를 보이기 위해 지었다고 전하는 ≪풍아록≫은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기도 했던 성현이 음악에 대단한 조예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자전(自傳) <부휴자전(浮休子傳)>을 비롯한 성현의 다양한 문학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용재총화 천줄읽기

<용재총화 천줄읽기>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국사가 기록하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은 성현이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잡기류 문헌이다. 이야기는 인물 일화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걸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데, 아마 당대 문인들의 잡기류에 대한 관심이 성현으로 하여금 이 책을 짓게 한 듯하다. 이야기의 소재는 좋고 나쁜 것, 또는 중하고 경한 것을 가리지 않아 친구들 간에 담소했던 것은 비록 비리라 할지라도 기록했으며, 여러 곳을 다니며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말 그대로 ‘총화’가 되었는데 국사가 갖추지 못한 것을 고루 수용했다. ≪용재총화≫가 다른 잡기류와 다른 점이 바로 이야기의 유형에 대한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특히 ≪용재총화≫에는 인물 일화가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실렸는데, 사대부의 일화는 물론, 장수·음악가·궁사·사냥꾼·독경사·맹인·성대묘사꾼 등 거의 모든 유형의 인물이 망라되었다. 중국 사신·야인·왜인의 풍속까지 기록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국사에서 취급되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국사에 보탬이 될 만한 것들이다. 그중 놀 만한 곳은 삼청동이 가장 좋더라 ≪용재총화≫에는 324편의 매우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만큼 오늘날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한양의 경승지’ 편에서는 한양의 경치 좋은 곳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한양의 도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적다. 그중에서 놀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다음이며, 쌍계동(雙鷄洞)·백운동(白雲洞)·청학동(靑鶴洞)이 그다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삼청동에 대해서는 “북쪽은 맑은 샘물이 어지러이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들은 조밀한데, 깊숙한 바위 골짜기가 있다. 얼마 못 가서 바위가 끊어지고 낭떠러지를 이룬다. 바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모두 진달래와 단풍잎이니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쳐 사대부들이 많이 와서 논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삼청동은 물 맑고 놀기 좋은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고금의 풍속’에서는 풍속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 사치함을 경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미 찬상을 마련하고도 또 찬반(饌盤)을 마련하니 좋은 안주와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 없다. 탕(湯)이나 구운 고기는 모두 쌓여서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술이 끝나기도 전에 번거롭고 조급한 관현(管絃)을 뒤섞어 날랜 장고와 빠른 춤을 추되 쉴 줄 모른다” 하는 부분을 보면 지나치게 차려 먹고 마시고 놀아 직무를 폐한 것을 꾸짖는 듯한 내용이 나와 오늘날에도 새겨 읽을 만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