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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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현남 오빠에게> 여성의 삶을 정가운데 놓은 서로 다른 일곱 편의 이야기 다양한 문화 권역으로 ‘페미니즘’ 이슈가 한창인 현재, 한국 사회에서 글을 쓰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3-40대 작가들이 국내 최초로 ‘페미니즘’이라는 테마 아래 발표한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가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다. 성차별이 만연한 이 시대 명실공히 뜨거운 현장 보고서가 되어준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등 여성 작가 7인이 함께했다. “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나란한 방향으로 놓여 있기만 해도 마음을 놓기에 충분했다.”(발문 중에서) 늘 누군가의 ‘며느리’, ‘아내’, ‘엄마’, ‘딸’로만 취급되어 살아온 ‘김지영’ 씨의 부당한 성차별의 기록에서 한 걸음 나아가, 또 한 명의 ‘김지영’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이 일곱 편의 이야기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촉발된 다양한 페미니즘 선언과 운동이 펼쳐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가슴에 오래 머무르는 ‘이야기’로 “울컥 치미는 반가움과 그리움”을, 이들의 애인과 남편, 가족과 친구 등에게는 또 다른 공감과 위로, 성찰의 소중한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국경시장

<국경시장> 편집자의 책 소개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설계하는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_신형철(문학평론가) 현실과 상상을, 고통과 환희를 오가며 피어나는 이야기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최다 수상 작가 김성중의 두번째 소설집 유려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감각을 촘촘하게 풀어놓는 소설가 김성중의 신작 소설집 『국경시장』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이름 앞에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최다 수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데서 알 수 있듯, 김성중은 꾸준히 주목받으며 자신만의 소설세계를 단단히 구축해왔다. 첫번째 소설집 『개그맨』 이후 사 년 만에 펴내는 이번 소설집은, 그간 그가 보여준 자유롭고 개성적인 상상력이라는 강점을 유지하되 그 위치를 좀더 현실 쪽으로 옮겨와 서사에 둔중함을 더한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아이처럼 자유롭고 경쾌했던 김성중의 세계가 현실로 중심을 한 걸음 옮길 때 벌어지는 일은 환상과 실재의 오묘한 뒤섞임이다. 한 편의 음악처럼 리드미컬한 문체와 조밀한 구성은 이 뒤섞임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강렬한 뒤섞임 속에서 독자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단숨에 작품들을 읽게 될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설은 끝에 도달하지만, 읽고 난 뒤의 여운은 읽는 시간보다 더 오래 독자의 마음속을 맴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 지점인 ‘국경’처럼 가짜와 진짜 사이, 환희와 고통 사이, 이야기와 이야기의 근원 사이, 그리고 작품과 독자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는 움직임이 바로 김성중의 소설이 향하는 곳이다. 거대한 욕망에 내포된 이야기의 힘!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욕망’뿐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동경한 ‘정체성’ ‘거대함’ ‘위대함’은 결국 작가의 욕망 자체였지 서사의 크기가 아니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은 욕망으로 뒤범벅된 인물들과 그 세계를 내세우고 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파는 「국경시장」, 천재적 재능을 얻는 대신 짧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택해야 하는 병에 대한 이야기 「쿠문」, 촉망받던 모델이었으나 교통사고로 삶의 빛을 잃어가는 에바와 분쟁 지역을 서슴지 않고 다니는 보도사진가 아그네스라는 두 친구의 욕망과 이야기를 역행적 구성으로 촘촘하게 그려낸 「에바와 아그네스」 , ‘여왕’으로 불리는 킹코브라에게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동족」, 완벽한 곡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필멸」 등 소설 속 인물들은 특별한 악인이거나 비범함을 지닌 천재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기에, 그래서 무언가를 가질 수 없기에 그것을 더욱 욕망하는 그들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욕망에는 작가 자신의 욕망 또한 담겨 있다. 물론 작가의 욕망은 앞의 것들처럼,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나와 내 동생에게, 류와 첸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재능에 대한 오랜 증오가 되살아났다. 내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질투하는 영혼을 만드는 천재들이 없는 곳이다. 류가 꿈꾸는 세상과 정반대인 그곳은 자잘한 인간들이 시시한 행복만 누리는 곳이다. 시시한 행복이야말로 내가 누려보지 못한 것이기에.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문」 부분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와 수납장과 자잘한 물건들은 물론 문마저 사라졌다. 낙경씨는 창턱에 놓인 채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흰 두부처럼 네모반듯한 실내를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절반의 상태로, 육체는 없으나 사고는 할 수 있는, 환상의 발생상태인 그는 또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관념 잼」 부분 그러나 김성중은 욕망을 다른 방향으로 뒤집어 새로운 경계 지점을 제시한다. 그가 그리는 해소되지 않는 욕망은 얻지 못함에서 오는 고통인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낳게 하는 원동력이다. 「국경시장」에서 주인공은 ‘나’라는 인물이지만 소설의 시작과 끝 부분의 화자로 영사관에서 근무하는 ‘조’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나,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고 따라서 그의 기도는 작가에게 바쳐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작가는 그가 겪게 될 다음 일을 훤히 알기에 등장인물의 기도를 들어줄 수가 없다”고 능청스럽게 작가의 목소리를 개입시켜 서사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야기를 향한 욕망은 다시 이야기를 이루는 강력한 테제로 작동하고, 나아가 소설을 촘촘하게 직조하는 구성 자체가 된다. 환상적 세계라 불리는 김성중의 소설세계는 사실 그 무엇보다 우리 현실을 향한다. 또한 글이라는 허구를 통해 글 속에 환상을 집어넣는 과정, 욕망과 욕망을 경유하는 과정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자전소설인 「한 방울의 죄」가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희정이는 내가 만난 최초의 이야기꾼이었다. 그애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환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없는 잠옷과 없는 어머니, 그 밖에 부재하는 모든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채워넣기 위해, 공란이 그렇게도 많은 어린 삶을 방어하기 위해 숱한 거짓말을 발명한 것이다. 그것을 거짓말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 방울의 죄」 부분 욕망이 결핍으로 가득찬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힘으로 바뀌는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이 매혹적인 욕망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는 상상이 가진 진정한 힘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 두번째 책을 묶으면서 소설 쓰는 일이 볼리비아 해군과 같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내륙 국가인 볼리비아에는 묘하게도 해군이 있다. 패전 후 영토를 뺏기고 남미 최빈국으로 전락한 볼리비아는 자신들의 지도에서 바다가 사라진 이후에도 해군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늘날 볼리비아 해군은 해발 삼천팔백십 미터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배를 탄다. 2년 전 내가 티티카카에 갔을 때 바다 없는 해군들은 하얀 제복을 입고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문학이 전체성의 바다를 잃어버린 후에도 작가들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훈련을 한다. 더이상 도스토옙스키나 멜빌, 마르케스처럼 인류자체를 폭로하겠다는 야심과 역사를 하나의 캐릭터처럼 간주하는 포부와, 위대함에 대해 쓰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작가들은 사라진 게 아닐까. 정확히 말해 그런 작가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바다의 시대는 지나가버리지 않았는가라는 의심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품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쓸쓸해지는데, 나는 항상 스케일이 큰 문학을 동경해왔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동경해 작가로 입문했더니 바다는 보이지 않고 남은 이들이 파편에 현미경 대는 글쓰기를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 이건 뭔가 마르크스 공부를 시작한 날 선배가 “난 오늘부로 깃발 내린다. 내일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할 거야. 너한테 세미나 해주는 게 내가 하는 마지막 운동이다”라고 말하던 것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전체를 ‘전체적으로’ 그리는 데생은 불가능한 시대라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이따금 놀랄 때가 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뒤늦게 읽고 충격을 받았는데 작품이 위로하는 세계가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바다로 나가는데 성공한 작가도 있구나 싶었다. 물론 작은 세계를 흠잡을 데 없이 쓰는 작가들이 훨씬 더 많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동경한 ‘전체성’ ‘거대함’ ‘위대함’은 결국 작가의 욕망 자체였지 서사의 크기가 아니었다. 나는 들쭉날쭉한 발자크를 몹시 사랑했고 같은 시대의 스탕달이 만든 줄리앙 소렐을 레날 부인만큼이나 아꼈는데 비단 문학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 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를 썼을 때 느꼈을 흥분과 큰 야심을 사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을 쓴 조반니 베르가에게 마음을 뺏겼다. 시칠리아 출신의 이 작가는 ‘패배 총서’를 기획하고 첫 권에 어부가 등장하는 장편을 썼다. ‘패배’를 ‘총서’로 쓰겠다는 기획 자체가 근사하지 않은가. 실제 그 총서가 두 권의 책에 그친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작가의 야심과 박력을 사랑한 것이다. 큰 소설을 향한 거대한 기획서 같은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두번째 책의 인물들이 그렇게 박력이 넘치는 것 같지는 않다. 외려 게으르거나 소심하거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거나 시무룩하다. 이중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인물의 내면과 작가의 주파수가 일치할 때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내 상태가 그런 것 같다. 8년 째 소설을 쓰고 있고, 사는 일도 정신이 없는데 마음속에는 박력 넘치는 큰 기획서 한 장을 지닌 채 허둥대는 작가. 이게 현재의 내 모습이다. 쓰는 일과 사는 일이 다 같이 복잡해지면 나는 볼리비아의 해군을 떠올린다. 언젠가 하얀 제복을 입고 호수 아닌 바다로 나갈 때가 있으리라. 그때까지 뱃멀미를 참으며 훈련을 거듭하는 수밖에. 그럴 수밖에. 2015년 2월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에디 혹은 애슐리> “나는 꽉 차 있어요. 혼란으로도, 기쁨으로도, 절망과 희망으로도요. 나는 계속 나아갈 거예요.” 단단한 현실부터 환상 동화까지, 이야기를 향해 돌진하는 김성중 소설의 놀라운 스펙트럼 “내면에 특별한 이야기의 단지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추천사 구병모) 믿게 만드는 작가, 실재와 상상을 기막히게 엮어내는 김성중의 세번째 소설집 『에디 혹은 애슐리』가 출간되었다. “삶과 글쓰기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는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평을 받으며 제6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상속」을 비롯해 총 여덟편의 단편이 실렸다. 운동권 대학생들이 중년이 되어버린 현실부터 다양한 동화가 겹쳐진 세계에서 동화 속 소녀들을 구하는 여성, 성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에디/애슐리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소설들이 각기 또렷한 개성을 빛낸다. 먼 미래에서 현재를 조망하는, 또 과거와 미래가 의미있게 연결된 현재를 그려내는 이 매력적인 소설집을 통해 김성중은 다층의 시간, 다양한 인물과 다면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선사한다. 미래를 통해 감각하는 현재 이어지는 시간과 계속되는 이야기 「레오니」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오년에 한번씩 고향인 필리핀으로 돌아와 함께 대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어느날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어린 레오니의 시선과 이미 훌쩍 어른이 된 레오니의 시선이 겹쳐지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먼 훗날 그리워하게 될 그날의 밤과 먹고사는 고달픔, 가족의 의미를 잔잔하게 담아낸다. 책 한권을 통해 연결된 열여덟 소년과 예순다섯 노인의 우정을 그린 「해마와 편도체」, 운동권 대학생들의 옛 이야기와 중년이 된 현재 이야기를 교차해서 그린 「정상인」 역시 미래에서 현재를 감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때의 만남과 우정, 함께 보낸 시간들이 미래에 어떤 의미가 될지를 현재에서 문득 통찰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그 과거가 빚어낸 현재, 미래를 쌓아가고 있는 지금 순간을 조망해 시간과 삶의 의미를 짚어낸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상속」은 문학아카데미에서 ‘시절 인연’으로 만난 기주와 진영이 당시 선생님의 유품인 책들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 시간을 그렸다. 책과 글, 그리고 그들이 함께했던 나날들은 “몇백년 전의 세계가 가볍게 시간을 넘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반복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마녀죠. 그렇지 않나요?” “당연하지. 그게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던가?” 묻혀 있던 용기를 회복하고 나아가는 인물들 후반부에 배치된 소설들에는 나약한 인물이 단단하게 성숙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 서사가 등장한다. 여성, 남성을 넘어 다양한 젠더 고민을 다룬 「에디 혹은 애슐리」의 에디/애슐리는 불면증을 겪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인물로, 로봇 ‘엔도’를 만나면서 점차 스스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잠을 되찾게 된다. 어릴 적부터 폭력에 노출되어 정신적 결핍을 겪어왔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되지만 그 역시 다시 잃게 되어 슬픔과 분노에 찬 인물들은 「나무추격자 돈 사파테로의 모험」과 「배꼽 입술, 무는 이빨」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들을 슬픔과 분노에서 건져올리는 건 하나 남은 아내의 사진을 들고 도망치는 나무나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내뱉는 배꼽처럼 환상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들이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사건을 통해 인물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을 마침내 마주하고 소화해나간다. 마지막에 실린 「마젤」에는 이번 소설집의 등장인물 중 가장 큰 폭으로 변화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남편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던 ‘그녀’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경로를 이탈하여 동화 속 세계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라푼젤, 도로시, 빨간 모자 등 동화에 등장하는 ‘소녀’들을 구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그녀는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향해, 동화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그 폭과 깊이가 놀랍도록 다채로운 이번 김성중 소설들은 ‘몽상’이라는 단어로 묶일 수도 있을 법하다. 인물들은 실제로 꿈을 꾸거나 촌스럽지만 묵직한 이상을 꿈꾸거나 환상을 겪는다. 이때 “몽상은 습관이 아니라 소신”이며 “삶을 대하는 태도이자 세상에 맞서는 자세”(해설 백지은)다. 몽상을 통해 좌절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을 지키고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을 만나면서, 독자는 김성중이 만든 환상의 이야기 속에서 각자의 용기와 믿음을 찾아낼 것이다.

이슬라

<이슬라>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아홉 번째 책 출간! ■ 이 책에 대하여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아홉 번째 소설선, 김성중의 『이슬라』가 출간되었다. 2018년 2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김성중의 이번 소설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의 권위에 힘입어’ 찬란한 문학의 힘을 보여줬던 2018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상속」에 이은 또 하나의 죽음을 매개로 한 소설이다. 84세의 나이가 되어 죽음을 앞둔 나의 이야기와 열다섯 살의 나이로 백 년의 세월을 보낸 나의 이야기가 액자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죽음이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죽음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공포스러운 사건이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오히려 인간은 삶의 의지를 맹렬히 느끼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러나 정작 죽음이 없는 영생의 삶이 주어진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작가는 이 부분에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시간과 날짜는 어김없이 흘러가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다. 임종을 앞둔 노인은 죽기 전의 그 상태로, 임신한 여자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백 년의 시간을 살아낸다. 그 누구도 성장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기력과 권태, 절망에 빠진 채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죽음이 없는 시간 속에 인간은 한낱 유령에 불과하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나’와 이슬라는 그 세계의 정중앙으로 뛰어 들어가 보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세상은 난봉꾼들로 가득하거나 무기력한 인간들로 가득할 뿐이다. 달라지려 해도 달라질 것 없는 세계는 그 극단의 삶 어느 쪽에도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재난 같은 현실의 해결책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착과 사랑을 제시한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유의미한 세계로의 진입을 위해 버려진 아이들의 엄마로 살기를 자처한 에디/애슐리가 그렇고, 나’와 사랑에 빠진 이슬라도 그렇다. 이슬라는 나의 행복을 위해 “죽음을 낳는 자궁”인 자신의 본분을 다시 깨닫고 죽음을 낳고, 이슬라가 죽음을 낳게 된 이후 세계는 다시 태어남을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삶, 본래의 세상을 회복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 이후 세상은 다시 활기를 찾는다. 죽음은 절망이 아닌 삶에 대한 애착을 인간들에게 줌으로서, 죽음이 있기에 삶의 의미가 생겼고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일 같은 커다란 꿈을 품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세상의 삶에 대한 절망이 아닌 삶에 대한 애착, 죽음과 죽음 없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소설이다.

개그맨

<개그맨> 2008년 등단한 김성중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사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며, 순수 상상의 환영과 패러디 사이를 교란하는 소설. 이를 통해 하나의 소설이 아니라 복수로 분산하는 기능담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 「개그맨」등 9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 한국 스릴러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젊은 소설가 8인의 빅뱅! 손끝에 닿을 듯한 진실과 미스터리, 온몸을 조이는 팽팽한 긴장감, 당신의 머릿속에 정렬되거나 일그러진 망상의 조각들 「왼쪽의 오른쪽」「디포의 주머니」「3」「창백한 백색 그늘」 「노인」「안나의 테이블」「불멸」「나는 언제까지 젊고 아름다운 것일까」 ▣ 한국 스릴러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젊은 소설가 8인의 단편 수록 한국 문학을 이끌어 가는 소설가 8인(한유주, 김종호, 박주현, 서준환, 김숨, 박솔뫼, 김성중, 김태용)의 소설을 담은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가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 중 ‘망상’, ‘유실’, ‘보관’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각 작품에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일들과 그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인물 내면의 심리, 치밀한 사건 구성을 바탕으로 한 긴박감과 반전이 깃들어 있다. 나아가 소설가 개개인은 지금껏 해온 집필의 성격을 달리하거나 언어 실험을 확장함으로써 한국 스릴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스릴’감이 큰 작품을 두루 ‘스릴러’라 칭한다면,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에는 스릴감과 더불어 기억의 재구성, 환상과 망상이라는 복합적 감각을 일깨우게 하는 재미 요소가 곳곳에 스며 있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덟 편의 소설은 우리에게 어떤 앎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 소설들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소설이 아니라 감추는 소설이고, 시작하자마자 멈추어버리는 소설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책을 펼쳐든 우리들은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지 모릅니다. “뭔가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자꾸 번져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주는 앎이 아닐까요? 우리는 언젠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는 사실, 무언가를 잃었다는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제는 유실물이 되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무언가를 희미하게 떠올리게끔 하는 것, 그것이 이 여덟 개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진 힘입니다.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의 여덟 개 문을 두드려 봅시다. 물론 그 문 안쪽에 우리가 찾는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분명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실물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제 수수께끼”입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이 되찾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저 문 안쪽에서 발견해야 할 앎입니다. 이 이야기들의 운명은 이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유실물의 운명이 그것을 발견한 자에게 달려 있듯 말입니다._조연정(문학평론가) ▣ 믿을 수 없는 기억, 범인을 향한 시선의 포위, 사건의 긴박한 재구성 김성중의 소설 「불멸」에는 모리스 몽쿠르제 음악원에서 최고의 악보인 「불멸」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차지하려는 스무 살 앙투안의 광적인 탐욕과 질투가 그려진다. 앙투안은 자신이 지은 악곡이 분명한 「불멸」의 옆에 이와 비슷한 제2, 제3의 악보가 등장하자 그 악곡의 주인이라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앙투안은 이런 탄식에 속으로 뜨끔했다. 곡의 주인이 비투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진실은 영원히 파묻힐 것이다……. 주변에서 람세스나 비투스에 대한 질문이 빗발치자 가뜩이나 예민한 앙투안의 신경은 폭발할 것 같았다. ‘이 음악은 내 것이 맞아. 집시풍의 카덴차가 그 증거야. 이건 우리 고향의 집시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이 틀림없어.’ - 본문 중에서 지금이라도 곡을 포기한다면? 그러나 재산도 지위도 없이 오직 부러진 야심만 품고 살아가기에 자신은 너무 젊지 않은가. 그와 같은 공허에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흰여우처럼 영리한 영국 놈이 「불멸」의 주인이 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었다. 귀족 신분에 머리도 좋고 출세가 보장된 제프리에게 이 악보는 단지 트로피의 개수를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가진 목동의 소중한 보물을 탐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본문 중에서 김태용의 소설 「나는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다운 것일까」에는 형사인 ‘나(이만주)’에게 찾아온 여자 ‘배정미’와 그녀를 1년 넘게 괴롭힌 ‘안현마’가 등장한다. 배정미는 안현마에게 집을 빼앗기고 빚을 지게 된 처지로, 5년 전에 ‘이치우’라는 남자와 이혼을 했다. ‘나’의 사생활에는 한순간 세 사람이 파고들어 이 사건에서 점점 빠져나오기 힘들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을 기억한다. ‘아’라고 발음할 때와 ‘오’라고 발음할 때 벌어지는 입술의 모양을 기억한다. 이 기억은 언제 왜곡될 것인가. 언제 망각의 늪에 잠길 것인가. 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이 여자를 믿을 수 없다.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믿게 된다. 믿어라. 그녀의 진실이 전진한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입술이 떨린다. 머리를 쓸어 올린다. 얼굴을 만진다. 어깨가 떨린다. 흉터가 있는 팔목을 돌린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내 귀에만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사람을 죽여 주세요.” - 본문 중에서 ▣ 감추어진 개인사와 그늘진 가족사, 말없는 단서들의 진실한 신호 한유주 소설 「왼쪽의 오른쪽」에는 “어제 아침, 아니, 오늘 아침, 내가 발견한 몇 가지 징후들, 혹은 증거들, 혹은 사실들을 나는 믿지 않기로” 한 후, 그 일을 그려 보인다. ‘나’의 뒤를 따라온 한 남자가 ‘나’의 생명을 위협하자 “아버지였는지 큰삼촌이었는지 모를” 사람의 “리넨 재킷”이 언젠가부터 ‘나’의 체취가 되었음을 떠올리며 그에게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을 더없이 천천히 이야기한다. 나의 리넨 재킷에서 끝없이 풍기는 시취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근본적인, 본질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통함, 내가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비통함에 가까웠으나, 그때의 감정을, 적확하게 옮길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나는 어느 쪽으로 흘러가게 될까. - 본문 중에서 서준환 소설 「창백한 백색 그늘」에는 아버지인 ‘손인목’ 장로의 죽음을 맏아들인 ‘J씨’가 진술하고, 담당 형사인 ‘나’는 사건을 조사한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손 장로는 살아 있었고, J씨의 자술서에는 “내면적으로 괴로움에 시달리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난민 가족의 일원으로서 치러야 한 고통의 응보”라고 표현한다. 1960년대 서울에 번진 부동산 투기 열풍과 그때 서울로 이주한 손 장로 일가의 가정사를 발단으로 J씨와 그의 형으로 이어지는 비극이 사건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난민촌으로 보았으니, 그 글은 당연히 난민들의 세계와 난민촌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쓰던 글이 형의 유서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 글은 형의 이른 자살 때문에 미완성 유고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가 형의 유고를 넘겨받을 수 있었지요. 저는 형의 유고를 이어 써서 완성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1975년 6월 29일부터 1993년 5월 5일에 생을 마감한 주인공 ‘3’의 일대기를 다룬 박주현의 소설 「3」. 3의 연인은 두 아이의 아빠인 학교 수학 선생님이다. “단정하고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우수한 학생”인 3은 어느 날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태도가 돌변한 수학 선생은 이제 무자비함으로 가득 차 3을 “유령”으로 만든다. 젖은 유령과 3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검게 팬 구멍과 3의 눈이 똑바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3은 기다렸다. 젖은 유령은 무엇인가 말할 것이었다. 3을 만나러 온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모습인 건지, 왜 3을 찾아왔는지. 마침내 유령의 입이 달싹였다. 3이 무슨 말인지 들으려고 한 발짝을 앞으로 떼는 것과 동시에 시체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본문 중에서 집 근처 공원 웅덩이 속에 들어가 있던 “노인”을 본 이야기를 그린 김숨의 소설 「노인」. 꽁꽁 언 웅덩이를 깨려는 듯 곡괭이를 들고 선 노인과 마주한 ‘나’는 긴장감을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노인을 만나고, 그는 ‘나’에게 바둑 두기를 제안한다. 노인을 만난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고 연금 수급자인 아버지가 ‘나(아들)’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본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아들인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종이비행기 하나 접어줄 수 없었다. 나는 가능한 아버지가 아주 오래 살기를 바랐다. 심지어 아들인 나보다 더 오래 살기를, 부디 나보다 하루라도 더…….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노인의 육신을 박제라도 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 본문 중에서 ▣ 감각적인 언어 실험과 유희, 빈칸으로 남은 존재 혹은 무존재의 수수께끼 훔쳐 간 건지 잃어버린 건지 모르지만 주머니 속 뭔가가 사라진 데부터 사건이 시작되는 김종호의 소설 「디포의 주머니」에는 주머니를 털어 간 디포의 존재 또는 무존재의 가능성을 가정하면서 “확신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한다. 한편 “젊었을 때 J라는 이름”을 지닌 ‘B여사’의 존재와 ‘나’와의 관계가 그려진다. 하얀 물고기가 밖에 서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약간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하얀 물고기가 팔짱을 낀다. 걷는다. 멀어진다. 무엇으로부터? 존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디포로부터. 해가 지고 있었지만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달과 별이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주머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하얀 물고기에게 재미난 것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자, 여길 잘 봐.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 손에 쥐고 꺼낸 것만 같은 시늉을 했다. 하얀 물고기에게 줄 꽃과 청혼 반지는 진작 잃어버렸다. 대신 손을 좍 펼치자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어두워졌다. 칠판이 다시 넘어졌기 때문이다. 백묵이 산산조각 났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내 탓입니까? - 본문 중에서 박솔뫼의 소설 「안나의 테이블」에는 “내가 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안나’를 주인공으로 그린 후,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던진다. 안나는 하루가 다르게 테이블이 되어갔고 이제는 완전히 나무로 된 테이블이 되어 의식하지 않으면 책을 올려놓는 이곳이 안나의 배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요즘은 그저 테이블이네 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안나는 육 년 전 내가 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인물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죽어 혼자 살게 되었던 친구다. 안나가 소설의 모티프가 된 데에는 일가친척이 차례로 죽었다는 비극성에 있었지만 내가 다시 안나에 대해 뭔가를 쓴다면 이제는 글쎄 아무것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 방 침대 옆에는 테이블이 있고 이 테이블 위에 한자 공책을 올려놓고 연필로 뭔가를 쓰면 좋은 기분이 든다. 딱딱한 책상 위에서 사각사각 연필이 이렇게 움직이는 기분이란 정말 좋다. 이 테이블은 밤색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나무의 결이 보이고 좌식용 테이블인데 이 테이블 밑에 다리를 집어넣고 고개를 숙이면 낮잠이 잘 온다. 자다 일어나서도 바로 누우면 되고 여러모로 참 좋았다. 다른 점들을 발견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이 정도였다. 그런 테이블이었다. - 본문 중에서 하나. 만약 내가 다시 안나를 기억해 내고 안나가 사람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면 어떨까? 안나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둘. 극장 안의 곰도 결국에는 테이블이 되었을까? 테이블과 몇 명의 사람들로 단장은 어떤 서커스단을 만들려고 한 것일까? 셋. 나는 이제 테이블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 볼까 한다. 침대 위에서 쓰고 바닥에서 쓰고 그러면 안나는 테이블이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래서 침대가 되려고 할까? 아니면 사람이 되려고 할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 본문 중에서 『망상 해수욕장 유실물 보관소』에 담긴 여덟 가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진실을 쫓는 자와 환상을 말하는 자, 아직 말하지 못한 자 들이 숨겨 놓은 힌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또 잃어버린 망상의 조각들을 찾아 퍼즐처럼 하나씩 풀어나가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