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우리들의≫는 한 러시아인 가족의 이야기다. 작품 속 화자는 자신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개성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우리들의≫에는 열세 명의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열세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도블라토프 창작 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 속 이야기가 사실보다 더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주변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을 뿐만 아니라 실재 인물의 이름이나 직업,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작품 속에 집어넣고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작가의 상상력과 나아가 그의 예술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작가 도블라토프의 실제 삶을 조금만 알아도 작품 속 이야기가 실제가 아닌 픽션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작가의 치밀한 이야기 구조 속에 엉켜 있어서 그 확실한 기준점을 찾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이 또한 작가 특유의 창작 세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도블라토프의 이 같은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우리들의≫는 좋은 본보기다. ≪우리들의≫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제 작가의 가족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직 도블라토프의 작품을 접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우리들의≫는 단편 작가로서의 도블라토프의 세계와 그의 대표적인 창작 상의 특징을 동시에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미국 <뉴요커>지에 실린 열 편의 작품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다섯 편이 ≪우리들의≫에 실려 있을 정도로, 도블라토프 최고의 작품들을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또한 모두에게 친근한 가족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살아 있는 원형들(실제 작가의 가족들)의 용이한 비교를 통해, 앞으로 선보일 도블라토프의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문체를 중요시하는 작가다. 위에서 말했듯이, 주변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만큼, 그의 작품 속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이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언어로 표현하는 데 도블라토프가 들이는 노력은 굉장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 문장마다 수백 번씩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다듬고 또 다듬어서 탄생된 몇 단어로 이루어진 짤막한 문장에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압축적이면서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정확하면서도 쉬운 도블라토프의 문체는 러시아어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도블라토프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단행본조차 없는 실정이다. ≪우리들의≫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1997년에는 가까운 일본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이 작품은 도블라토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이 러시아 이민 작가를 처음 접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 세계와 현 러시아의 문학 경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작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에 주석을 달았다.
<여행 가방> 주인공 ‘도블라토프’는 출감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에서 들고 온 여행 가방을 구석에 처박아 두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어느 날 그는 우연한 계기로 그 가방을 발견하고 열어 본다. 셔츠, 양말, 양복, 단화, 모자, 장갑 등 특별한 물건은 없지만 그 안에 깃든 추억은 특별하다. 그는 가방 속 물건들 하나하나에 얽힌 일화들을 떠올린다. 각각의 일화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부정적인 단면들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도블라토프는 이마저도 유머로 승화시킨다. 이에 그 사사로운 추억들은 친구에게 흥미로운 경험을 듣는 것처럼 느껴지고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픽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사회의 모습이 너무나도 그럴듯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소설 속 설정과 실제 ‘원형’ 사이에 공통분모를 두고 예술적으로 가공하는 것은 도블라토프의 주된 창작 기법 중 하나다. 이러한 기법과 유려하고 유머러스한 입담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여행 가방≫은 미국으로 이민 간 도블라토프가 소비에트 시절부터 준비했던 모든 작품을 출판한 뒤 순수하게 미국에서 쓴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이 작품을 통해 이민 작가로서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세련되고 성숙한 문체와 기교를 선보여 작가로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그의 작품을 무엇 하나 게재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에서 집필을 시작한 이 책의 출판은 작가 개인에게 뜻깊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 사후에는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등에서 여러 도블라토프 관련 문화 행사가 열렸는데, ≪여행 가방≫ 육성 녹음 CD, ≪여행 가방≫ 캐리커처 등 각종 기념 상품을 팔기도 했다. 이는 도블라토프와 ≪여행 가방≫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의 문단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편협했는지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 여자> 러시아 제3세대 이민 문학 작가 러시아 작가들이 이민을 선택한 것은 정치 체제가 변하면서 문학의 풍토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에 공포를 느껴서거나, 체제의 변화는 없었지만 체제가 존재 자체를 부정할 정도로 강한 압박으로 다가와서였다. 작가의 입장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감내해야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다른 타국에 가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특히 모국어 환경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러시아 이민 문학은 크게 세 번에 걸쳐 세대별로 구분한다. 제1세대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과 그에 이은 시민전쟁 시기에 이민한 작가들을 일컫고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또 한 번의 대단위 이민 작가들이 나타났다. 스탈린 사망(1953) 후 잠시 존재했던 소련 문학에서의 ‘해빙기’ 후 1963년에 러시아의 한 신문에 이오시프 브롯스키(1940∼1996,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주제로 고발된 것을 시작으로 소위 ‘재결빙기’가 도래했다. 브롯스키는 1972년 정신 병동이나 수용소를 선택할 것인가 혹은 이민을 선택할 것인가로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 이는 강요된 이민이었다. 이것이 제3세대 이민 문학의 시초다. 제3세대 이민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에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속한다. 그는 1976년 소련 기자협회에서 제명을 당하고 1978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제3세대 이민 문학은 유태인들이 많았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며 이들은 러시아 전통 문학의 계승 및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따라서 제3세대 이민 작가들이 구축한 문학 세계는 대단히 다양한 것이 그 특징이다. 작품 소개 ≪외국 여자≫에서 “미국에 사는 러시아 여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주인공인 마루샤다. ‘실수로’ 러시아에서 뉴욕의 포레스트 힐스로 이민 왔으며 아이가 있는 이 여인의 실패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성공적인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루샤의 실수는, 그녀의 이민 결심이 다른 이민자들처럼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소련 밖에서의 삶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마루샤는 이민 오기 전에 세 번 결혼을 했다. 이 작품은 결혼 생활에 실패한 마루샤가 어떻게 라파엘 호세 벨린다 치코릴리오 곤잘레스와 네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의 경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에 살고 있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삶을 상세하고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108번가에 모여 살고 있는 러시아 이민자들이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이 소련에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던 것과 이민 후 뉴욕에서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이들은 미국의 기준으로 하층민의 삶을 살아가지만, 소련에서보다는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어 아이러니가 생긴다. ≪외국 여자≫는 1985년에 미국 뉴욕에서 집필되고 1986년에 출판되었으며 199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도블라토프는 그의 조국 소련에서 출판하기를 그토록 원했지만 단 한 편의 작품도 그럴 수 없었다. 1978년 미국으로 망명을 한 후로 출판을 왕성히 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가 뉴욕에 살았던 12년 동안 열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외국 여자≫를 같은 해에 출판된 ≪이민 가방≫과 함께 도블라토프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도블라토프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실명으로 작품에 등장함으로써 사실성을 고양해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시학적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단순하고 명료하며 일상의 대화를 옮겨 놓은 듯한 어조로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처럼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도블라토프 특유의 문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도블라토프의 문학 세계를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으며 다른 작품과의 변별적 자질인 러시아인들의 미국 이민 생활을 사실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지적 유희일 것이다. 작품의 특징 -이름: 러시아 인명은 고유한 이름, 아버지의 이름에서 파생한 부칭(父稱), 한 가문이 공유하는 성(姓)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름에는 애칭이 여럿 있을 수 있다. 즉 애칭은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나 가족 사이 혹은 부부 사이에서 쓰이는데, 그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편 이름과 부칭을 같이 쓰면 ‘존경’의 의미가 부여된다. 또 예컨대 군대에서 호명을 하거나 관공서에서 다른 사람과의 혼동을 줄이기 위해서 이름, 부칭, 성을 모두 쓸 때도 있다. 따라서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도 인명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는가가 그 인간관계를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외래어 사용: 도블라토프는 이 작품의 제목 “외국 여자”가 시사하듯이 이국적 정서를 강조하고 있다. 즉 독자들은 외국의 등장인물 이름과 정부 기관명 등에서 생소함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국적 정서를 느낄 수 있는데, 그 기본적인 내러티브 기법은 외래어 사용에 있다. 이러한 기법은 몇 가지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중 하나가 쉐보레, 올즈모빌, 임팔라 등의 미국산 자동차 이름이다. 또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포레스트 힐스, 블로업 레스토랑, 퀸스, 애머스트, 그 밖에 거리 이름 등이다. 그다음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영어 표현들로 칩스(Chips), 오케이(Okay), 크레이지(Crazy), 택스 디덕터블(Tax Deductable), 앰트랙(Amtrack), 개라지 세일(Garage Sale) 등은 러시아어로 전사(轉寫)되어 사용되고 있다. -언어유희: 도블라토프는 이 작품의 말미에서 “러시아 알파벳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신에게 감사한다”라고 했다. 예를 들면 마루샤와 출판가 자레츠키의 대화에서 자레츠키가 “자위(masturbation)”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마루샤는 “월경(menstruation)”으로 알아들음으로써 독자에게 웃음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의 차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동일한 기법으로 마루샤는 “처녀성 잃기(defloration)”를 “세관 신고서(declaration)”로 알아듣고, “스핑크스(Sphinx)”를 “불결함(stinks)”으로 알아듣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 역시 언어유희의 극치를 보여 준다.
<수용소> 도블라토프, 교도소에서 작가의 길을 걷기로 하다 ≪수용소(Зона)≫는 수용소에 얽힌 짧은 이야기 열네 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이다. 도블라토프가 군 전역 직후 1960년대에 쓴 작품부터 미국 이민 후 1980년대에 쓴 작품까지 집필 시기가 모두 다른 열네 편의 단편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실로 꿰었다. 1959년 레닌국립대학교 핀란드어과에 입학한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는 불성실한 학업 태도로 3학년 때 퇴학을 당한 후 입대 통지서를 받는다. 그렇게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간 교도관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되는데, 첫 열 달 동안 복무한 곳이 바로 ≪수용소≫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코미 공화국이다. 레닌그라드 출신으로 교양 있게 자란 20대 초반의 인문학도에게 산전수전 겪으며 범법으로 잔뼈가 굵은 자들이 가득한 수용소의 “끔찍한 조건들(кошмарные условия)”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도블라토프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고, “자신을 살려주고”, “일말의 진실이 있는” 시(詩)를 쓰면서 군 생활을 버텨 냈다. 교도관 도블라토프에게 “쓰는 것”은 수용소라는 폐쇄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숨통이기도 했지만, 막막한 미래를 살아 낼 하나의 빛줄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 교도소에서 작가로의 길을 확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도 명확하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범인(犯人)의 이야기, 범인(凡人)의 이야기 러시아에서는 수용소를 예술적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한 ‘수용소 문학’이 발달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솔제니친이나 샬라모프 외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죽음의 집의 기록≫ 같은 경우) 역시 수용소 문학에서 언급된다. 도블라토프의 ≪수용소≫는 이 장르의 계보를 잇는 20세기 작품 중 하나다. 기존의 수용소 문학과 도블라토프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그가 ‘수용소’를 삶과 동떨어진 특수 공간으로, 그 속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을 일반인과 다른 특이한 사람들로 취급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단지 일상과 격리되어 있는 공간인 수용소에서,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뿐이다. 솔제니친이 수용소를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이라 할지언정, 도블라토프는 ≪수용소≫에서 그 끔찍한 정황들을 “생리학 보고서”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 지옥은 우리 자신들인데 말이죠….” 작가의 관심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머무른다. 작가 자신도 명확히 밝힌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관심은 삶이지 감옥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지, 괴물이 아니고요.” ≪수용소≫는 수용소라는 특수 공간에서 살아가는 범인(犯人)의 범인(凡人)적 이야기다. 첫 편지에서부터 ≪수용소≫가 기존의 다른 수용소 작품과 다르다고 확실하게 선을 긋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