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걷는 길> 2011년 개정 초등5학년 교과서 수록 기념 재출간 (「서른다섯, 서른여섯 굽이를 돌며-우정에 대하여」 전문 수록)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국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로부터 깊고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이순원이 1996년 출간했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실천문학사의 청소년문학선인 담쟁이 문고로 재출간한다. 2011년 초등5학년 교과서 수록을 계기로 15년 전 출간 당시, ‘아버지’가 주요 대상층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 개정판은 ‘아들’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해서 앞부분의 다소 무거웠던 배경을 대폭 축소하였다. 그간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만났던 이순원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언제나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 지나온 것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자리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은 이순원이 ‘성장’의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운 대표작 중 하나로 지금은 장성해버린 작가의 두 아들이 어린아이였던 시절에 함께 넘었던 대관령 고갯길을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한수임 작가의 서정적인 그림이 덧붙여져 행간의 여운과 감동이 더욱 커졌다. “사랑해요, 아빠!”, “사랑한다, 내 아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과 함께하는 길 화자인 나는 소설가이자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강릉 대관령 고개 아래 본가를 둔 나는 최근에 발간한 소설책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상태다. 그 책에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집안의 오래된 상처를 드러내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기도 할뿐더러 새로 나온 족보를 핑계 삼아 다녀가라는 아버지의 전언을 들은 나는 큰아들인 상우와 함께 대관령을 걸어 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흔히들 ‘아흔아홉 굽이’라고 할 만큼 크고 작은 굽이가 셀 수없이 많은 해발 800여 미터 이상의 대관령 길을 걸어 넘기 시작한다. 작가 이순원이 15년 전, 그러니까 등단 후 11년 만에 내놓았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은 작가의 자전적 내용에 바탕한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출간 직후, 어지러웠던 마음과 당시 어린아이였던 두 아들과 함께 걸었던 대관령 길에서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는 아들의 진심, 그런 아들에게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일러주는 아버지. 이들 부자의 대화는 담백한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긴다.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에 인생을 담다 출발 전과 도착 후에 해당하는 단락을 제외한 총 서른일곱 굽이로 나누어 담은 부자간의 대화는 마치 우리 인생 같다. 열아홉 굽이까지의 이야기는 10대의 아이에게 해줄 만한 자연만물에 대한 이야기와 집안의 내력을, 스무 굽이부터는 성인이 되어 이제 독립해야 할 시기가 되는 20대의 자식에게 부모가 해주고 싶을 이런저런 인생의 조언을, 그리고 아이 역시 아버지가 될 나이인 서른 굽이부터는 또 그에 걸맞은 ‘좋은 어른의 길’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서른다섯, 서른여섯 굽이를 돌며-우정에 대하여’는 2011년 개정 초등5학년 교과서에 전문이 수록되는 부분으로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계 맺기’란 무엇일까에 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주는 내용으로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개인주의’ 성향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정본 소설 사임당>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본연’의 사임당을 그리다. 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과 기록을 외면한 빈곤한 시선으로 탐구되어 전해져 왔다. 현모양처, 교육의 어머니, 군국의 어머니 등 시대의 요구에 따라 500년이 넘게 왜곡되어 온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언급되는 여성은 흔치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과연, 얼마만큼 진실인가? 강원도의 대표 작가이자 동인문학상부터 최근의 동리문학상까지 다수의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이순원이 문헌을 뒤지고 강릉 산천을 직접 걸으며 밝혀낸 사실들로 사임당의 삶을 재조명한다. 숙종의 시, 소세양의 『양곡문집』, 어숙권의 『패권잡기』 등 소설 속에 스며 든 역사적 사실 하나 하나는 독자들에게 사임당에 대한 오해의 묵은 때를 벗겨줄 것이고 막내 아들, 이우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몰랐던 인간 사임당의 희노애락을 전해줄 것이다. 사임당, 한 명의 온전한 예술가로 승화한 조선의 여자. 사임당은 손녀들이 차별 없이 교육 받길 바라며 ‘천자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적어 책을 만들어 주는 외할아버지와 아들딸 구별 없이 재산을 분배하고 남매가 함께 제사를 모시도록 한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이러한 열린 가풍 속에서 자란 그녀는 ‘세상 사람 모두 보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하는 당찬 소녀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자신의 당호를 짓고 여성 예술가로 재능을 펼치며 보기 드문 주체적인 길을 걷는 여인이었다. 조선 제일의 여류 화가가 된 것도, 아들 율곡을 대학자로 길러낸 것도 ‘아녀자’의 한계를 벗어나 학문과 기예를 익힌 ‘여성’으로서의 삶을 꿋꿋이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은 아내, 어머니, 며느리이기 이전에 자신을 귀하게 여긴 현명한 여인이자 예인으로 남은 주체적인 여성, 사임당의 이야기이다.
<오목눈이의 사랑> “안녕? 작아서 더 아름다운 별들아. 너희가 내게 이름을 주었구나” 태어나던 날 밤, 아름다운 별들의 운명적 움직임이 작은 존재들에게 선사하는 특별한 인연과 사랑 한국문학의 서정성을 대표하는 작가 이순원이 『정본 소설 사임당』 이후 2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오목눈이의 사랑』을 출간한다. 1985년 단편소설 「소」로 등단한 이후 21편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12권 등을 펴내며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오목눈이(뱁새)의 눈물겨운 모정과 모험을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장으로 담아냈다. 작가는 고향인 강릉의 대관령 숲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를 우연히 들었고, 이 새가 아프리카에서 1만 4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오목눈이 둥지에 알을 맡긴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새들의 특성과 생태, 지구를 반 바퀴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정에 착안해 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원고지 440매 분량의 이 소설은 작은 오목눈이의 여행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찾아야 할 삶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눈>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수상작가 이순원 6년 만의 신작 창작집 표제작 「첫눈」을 포함하여 7편의 단편 수록 맑은 문체와 풍부한 서정으로 우리네 삶을 오롯이 투영하는 이순원 신작 소설 「은비령」,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 「아비의 잠」 등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주옥같은 단편 이후, 장편소설에 주력해 온 작가가 오랜 기다림 끝에 신작 창작집 『첫눈』을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하였다. 이번 창작집 『첫눈』에서 이순원은 말의 아름다움이 흩뿌리는 잔잔한 서정 안에서 현실의 아픔과 사회적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내며 깊은 내면세계와 조응한다. 표제작 「첫눈」을 비롯해 「멀리 있는 사람」, 「라인 강가에서」, 「미안해요, 호 아저씨」, 「카프카의 여인」, 「푸른 모래의 시간」, 「거미의 집」 총 7편의 단편을 실었다. 표제작 「첫눈」은 언제 온 지도 모르게 흩날리는 첫눈처럼 인생에서 예측하기 힘든, 불현듯 다가오는 만남과 이별을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그렸다. 「멀리 있는 사람」에서는 혈연을 넘어선 우리 안의 유대성을 확인시켜, 현대인들에게 결여된 가족 간의 정을 되살리고 깊은 향수를 끄집어내 준다. 또한 「라인 강가에서」와 같은 작품은 개발 연대의 어두운 기억을 다시금 일깨워, 그 시대에 대해 우리가 진 책무와 역사의 희생자들까지 돌아보게 만들고, 「미안해요, 호 아저씨」는 도시화가 불러온 농촌 사회의 아픔과 함께 경계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존엄에 대한 각성을 일깨운다. 「카프카의 여인」은 주류라고 이름 지어진 것들에 대한 회의적인 고찰 안에서 거울과도 같은 우리의 이면을 가진 타인의 존재를 반추하게 해준다. 「푸른 모래의 시간」은 개개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들을 시간의 바다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하는 인간들의 유한성에 대해, 마지막으로 「거미의 집」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노령화 사회의 그늘을 작가의 슬픔을 묻혀 담아냈다. 외롭고 어두운 밤 홀로 유영하는, 그러나 희망의 별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순원 소설은 개인의 상처와 사회의 굴곡을 구체적 삶의 형상화를 통해 상기시킨다. 질책하며 몰아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따스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해 담담히 회고함으로써 개인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의 눈길을 건넨다. 이별과 사별,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마음속 깊이 담고 살아가던 세 사람의 남녀의 우연한 만남과 이뤄지지 못한 인연에 대해 잔잔히 그려낸 작품 「첫눈」. 프리랜서 ‘최’ 피디는 문화강연을 위해 울산의 한 여자고등학교에 간다. 그곳에서 국어 선생 윤과 음악 선생 김을 만난다. 강연을 끝낸 최 피디에게 윤 선생은 바닷가에 밍크고래 한 마리가 그물에 밀려와 죽었다는 얘기를 하며, 그 고래의 해체 작업이 부둣가에서 벌어질 테니 보기 힘든 광경이니만큼 함께 구경하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최 피디는 어릴 때부터 하나의 “신화이자 관념”이었던 고래에 이끌려 윤과 여선생 김과 함께 바닷가를 찾지만, 밍크고래는 이미 해체된 후였다. 고래를 보지 못한 채 근처 횟집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며, 고래에 대한 연민과 그를 통해 되살아 난 잃어버린 신화 안에서 자신들이 가슴에 묻어두었던 추억들을 자연스럽게 함께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최 피디와 여선생 김과는 어떤 익숙한 아픔을 감지하며 그리움과 운명에 “탄식”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가 끌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일상으로 돌아온 최 피디와 김 선생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날의 느낌을 이어보려 애쓰지만, 바쁜 일상의 현실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한다. “늦가을에 강릉 가다 보면 진부에서부터 대관령까지 ‘첫눈조심’이라고 쓴 임시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잖아. 그 얘기를 했더니 여기 사람들이 다 안 믿어. 이 사람들은 겨울이면 눈 속에 살아도 첫눈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첫눈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냥 봐선 온 지도 안 온 지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고, 길은 미끄럽고……. 그런 뜻이라고 말하면, 정말 그런 표지판이 있다면 그건 시(詩)지 교통 표지판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pp. 291~292) 순수한 서정 공간 안에 깊이 흐르는, 개인적인 것을 초월한 다문화 사회에 대한 심려 「미안해요, 호 아저씨」는 도시화에 따른 이농 현상, 그리고 국제결혼이라는 허울 좋은 이면 아래 숨은 인간 존엄성의 추락에 대해 경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소설가인 ‘나’는 초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말로 시작한 엽기적인 현수막 얘기를 듣는다. 나이 마흔다섯에 월남 처녀와 세 번째 결혼을 하는 고향 후배를 통해 구체적인 실상을 건네 들은 사람들. “월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하고 ‘초혼, 재혼, 장애자, 연세 많으신 분’이라고 써놓았다. 그거뿐인 줄 아나. 그 아래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하고 느낌표 두 개 팍팍 찍어놓고.” (p. 107) 같은 얘기를 듣고도 소아마비 동생을 둔 동창은 눈빛을 반짝이고, 나는 달도 별도 다른 먼 이국땅에서 홀로 눈물 흘리고 있을 “들꽃 같은” 여자아이에게, 그 가족들에게, 그리고 호 아저씨에게 미안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결혼 중매 현수막이 눈에 띈다. 결코 “멀리 있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태는 “그걸 내건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 땅의 누구 하나 예외 없이”함께 형성하고 있는 집단적인 비열함일지도 모른다. 들꽃 같은 여자아이가 지금 현수막이 내걸린 정미소 처마 아래에 서 있다. 이제 옆으로 조금씩 야위어가기 시작하는 열이레 달 아래에 이름도 없이 울고 서 있다. (p. 127)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라는 여인에게서 받은 이메일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여인」. 그는 신문에 칼럼이 실리는 날 아침마다 받게 되는 여러 통의 악담 메일 중, 그녀의 메일을 발견한다. 그녀는 “벌레는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말고는 어디에 있으나 꼭 벌레 같죠.”라고 하며 신문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을까 봐 불안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며 생산해 내는 이쪽의 기사와 논조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 구석으로 밀어내는 듯한 “어떤 분위기의 완강함”이 불안하다고 얘기한다. 이쪽과 저쪽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그어져 있는 선이 있었음을 깊이 인정하면서, 그 역시 그레고르 잠자의 불안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벌레의 생각도 우리가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꼭 벌레 같을 것 같고, 벌레가 글을 쓴다면 그 글도 꼭 벌레 같겠지요. 때로는 사람도 벌레 같을 때가 있고, 벌레의 생각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정말 벌레라면 그렇지 않을까요. (p.130)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벌레 같고, 그러면 저쪽에서 볼 때 이쪽은 어떨까요?” (p. 157) 유년 시절에 대한 애잔한 향수, 그리고 어머니 암컷 거미가 새끼 거미들에게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모두 먹을거리로 제공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현상을 빗대며 그린 「거미의 집」. 나이 든 노모를 누가 모시느냐를 정하기 위해 아들과 딸, 며느리들이 큰아들 집에 모인다. 큰 며느리는 어머니를 꼭 큰아들이 노모를 모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며, 사정이 되는 사람들이 모시는 것이 가장 정당한 방식이니 아들딸 구별 말고 순번을 정해 일정한 기간 동안 돌아가면서 모시자고 제안한다.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줄은 알지만 어머니와 같은 노인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여자”인 아내를 보며 큰아들은 벽에 등을 기댄 “정물” 같은 노모가 차라리 다른 집으로 가시는 게 편하실 거라며 자신에게 면죄부를 준다. 어머니의 모습이 무척 가볍고도 작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게도 중심도 없이 빈 껍질로만 남아버린 한 마라의 죽은 거미 같다고 생각했다. (중략) 아직 형체는 남아 있지만 쥐면 흔적도 없이 부서질 껍질뿐인 거미였다. 거미는 그래 살다 죽는다, 니가 제대로 못 봐 그렇지 자세히 보면 그 거미 몸에 새끼들이 바글바글할 거다. 새끼들이 제 어미 몸을 그래 껍질만 남기고 파먹고 살거든. 그때 어머니는 말했다. 거미는 젖이 없으니까. (중략) 어머니의 얼굴에서 연상되는 것은 서서히 말라가는 한 마리의 거미였다. 그는 조용히 ‘거미’의 방에서 나왔다. (pp. 209~210) 이에 격분한 딸들과 다른 형제들은 각자 자신들의 사정이 어려움을 얘기하기 시작하고, 이를 고스란히 옆방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어머니. 과거 우리를 지탱해 준 가족애, 우리를 단단하게 엮어주었던 온정은 지금 어느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일까. 새끼들에게 파먹일 것 다 파먹이고 나면 거미도 스스로 줄에 목을 걸지 않던가. 노인은 안간힘을 쓰듯 문 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p. 220) 이 외에도 우리의 토속적인 미신이자 신앙이었던 ‘명 어머니’를 소재로 유년 시절에 대한 짙은 향수와 어머니란 이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무게감을 애달피 그려낸 「멀리 있는 사람」을 비롯해 「라인 강가에서」, 「푸른 모래의 시간」 등 이순원 소설의 정수를 함께 만날 수 있다.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쓸쓸할 만큼 아름다운 정경 안에 수놓은 삶의 신비로운 무늬 이루지 못한 약속, 애틋한 그리움의 흔적, 아득한 예감, 아련한 향수… 애잔한 상처의 기억을 보듬는 치유의 여행 안에서 조우하는 영원성 「말을 찾아서」「시동에서」「강릉 가는 옛길」「은비령」 「매듭을 이은 자리」「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 ▣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수상작가 이순원 대표 단편 6편 수록 표제작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를 비롯해 이순원 대표 단편 「은비령」, 「말을 찾아서」, 「강릉 가는 옛길」, 「매듭을 이은 자리」 총 6편의 단편을 실었다. 이 소설집은 봉평, 시동, 강릉, 은비령, 위촌, 경포를 따라 정감 어린 추억들을 잔잔히 담아내면서 애잔히 유영한다. 가는 길마다 쓸쓸할 만큼 아름다운 정경 안에서, 상처의 기억을 보듬는 작가의 문학 여정이 펼쳐져 있다. 그 길에는 이루지 못한 약속, 애틋한 그리움의 흔적, 아득한 예감, 아련한 향수 등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을 찾아서」는 노새를 부리던 당숙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어린 시절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현재에도 치유되지 못한 갈등과 화해의 예감을 풀어놓고 있으며, 「시동에서」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시동의 해동여관 투숙자들을 통해 상처 입은 풍경을 그려내었고, 「강릉 가는 옛길」은 옛 은사의 부음과 함께 되새김질 된 유년의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고향과의 화해를 담고 있으며, 「은비령」은 시간이 멈춰버린 은비령에서 마음의 소금 짐 대신 별을 담아 오는 여행길을 아릿하게 펼쳐놓는다. 「매듭을 이은 자리」는 거역할 수 없었던 전근대적 신앙을 극복하며 새로운 세대의 장을 열어주고,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는 친구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낳은 신비로운 인연을 통해 깊은 여운을 남겨 준다. ▣ 아득한 기억 저편, 아픈 상처의 길에서 만난 유년 시절과의 화해 「말을 찾아서」에서 “나”는 정초부터 말[馬] 꿈을 꾸고 나서, 수시로 떠오르는 말고기와 말 생각으로 배 속과 머릿속이 편하지 못하던 중 봉평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후배의 원고 청탁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봉평과 함께 연상되는 노새 “은별”과 그를 부리던 “아부제”에 대한 불편한 마음으로 인해 글쓰기를 망설인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른들 사이에서 자식 없는 작은집의 양자로 결정되었다. 당시 나는 노새를 부리는 당숙과 그가 애지중지하는 노새 은별을 무척이나 창피하게 여겼는데 “노새집 양재 새끼”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으로 들릴 정도였다. 어린 마음에 사람들 앞에서 당숙이 주는 용돈을 당숙 앞에 던져버린 후, 당숙은 한동안 술에 절어 생활하다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당숙이 봉평의 산판장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돌자 집안 어른들과 당숙모의 염려 속에 홀로 당숙을 찾으러 간 나는, 당숙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풀어지면서 당숙을 “아부제”라고 부르게 된다. 어린 소년이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었다. 그런 나를 뿌듯해하며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찾아왔다고 자랑하는 아부제(당숙)과 함께 노새를 끌고 봉평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언제는 정 붙일 아들이 없어 돌아다닌다더니?” “아들이 없기는, 내가 노새나? 아들이 없게. 애비 산에 가서 안 온다고 이렇게 여게까지 데리러 오는 아들이 있는데. 자, 이제 나는 아들하구 떠나네. 해 져서 선선할 때 떠나야지, 짐승을 끌구 가는 기…….” (p.47) 그러나 나는 중3이 되어 노새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부제가 끌던 노새 은별과는 화해하지 못했다. 학비며, 교복이며, 시계며,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이 노새의 등에서 나왔음에도 나는 노새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아부제에게는 그저 동물이 아니었던 노새였지만, 어린 수호에게는 “태어나기로도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온갖 핍박 속에 오직 무거운 짐과 먼 길을 걷기 위해 생식력도 없는 큰 자지만 달고 나온” 노새였으며, 그런 노새를 끌고 일을 하는 노새 애비인 아부제가 그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노새에 대한 심리적 모멸감과 그로 인해 해소되지 못한 내면의 갈등이, 노새를 끝내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는 아부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함께 어른이 된 지금도 내가 말[馬]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노새와 아부제와 겹쳐지는 봉평에 관한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그의 슬픈 생애”에 대해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봉평은, 아부제와 함께 노새 은별을 끌고 봉평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밤길은 “달이 없어도 별이 좋은 밤”이었고, 아부제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도 “싫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 쓸쓸한 정경 안에 가시 박힌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여행 「시동에서」는 시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도망치듯 떠나온 사람들의 얘기를 풀어낸다. 시동이라는 글자를 풀면 “동쪽의 시작”이라는 의미이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여름 한철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바다와 함께 반짝이고, 가을이면 이내 거리 전체가 텅 빈 수족관처럼 무료해지고 심드렁해지”고 “이상하게 숨어 지내기 좋게 생각되는” 시동이 “동쪽의 끝 쪽” 같다고 느낀다. “동네가 왠지 나른하게 느껴져요. 동쪽의 시작이면 해 뜨는 곳의 시작이고, 그러면 희망의 시작이나 마찬가진데 막상 와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더라는 거지요. 왠지 지칠 때 생각나는 곳 같은 느낌이었어요. 실제 일을 하다가도 지치면 여기 생각이 나기도 했고요.” (p.83) 시동에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대는 최 씨와 이삼 일만 머물다 떠날 거라던 안 씨, 돌 담은 깡통처럼 요란한 김 씨 같은 해동여관 장기 투숙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동여관에 새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묻혀 온 또 다른 상처로부터 어떤 위안 같은 걸 받으며 시시껄렁한 농담 속에 자신들의 상처를 잠시나마 덮어둔다. 또한 흔적조차 사라진 역을 지키며 열차를 세우려 하는 “오래되고도 지독한 권태의 상징”인 박 씨 노인과 스스로의 몸에 칼을 대고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머물다 간 곳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모를 상처를 안고, 그 상처가 이끄는 대로 모여온 곳이 바로 시동이었던 것이다. 시동은 날개를 다쳐 더 이상 날 수 없는 제비들과 상처 입은 고래가 피해 오는 곳, 풍랑을 만나 조각 난 배들마저 찾는 곳, 이처럼 시동은 더 갈 데 없는 상처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는 노인이 섰던 자리에 여자아이와 함께 오래도록 서 있어보았다. 여자아이가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서로 깊은 비밀을 나눈 사이라는 뜻으로 내민 상처받은 영혼의 상처받은 손이었다. 왠지 그렇게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자 언젠가 꼭 한 번은 노인을 위해서라도 노인의 눈앞에 기차가 멈추어 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100) 위촌에서 온 뜻밖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하는 「매듭을 이은 자리」. “나”는 십오 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온 편지를 통해 완전 측면 화상을 보기 위해 대학생 시절 위촌의 어느 종갓집을 찾아갔던 옛 기억을 회상한다. “종택을 둘러싼 왕 대숲이 구름 같은 꽃을 피워 요란한 매미 소리마저 적막함을 더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종갓집에는 완전 측면 화상 대신에, 귀 한쪽 없는 화상이 사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 집의 후손들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고 스스로 귀를 자른, 옛 조상의 화상을 신처럼 받들며 그릇된 신앙에 구속된 채 종가에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전근대적 삶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화상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갓집 손자의 내적 갈등과 고백을 통해 억압의 상징이었던 위촌의 종갓집은 과거와 화해해 가는 현재를 묵묵히 암시해 준다. ▣ 별의 길을 따라 조우하는 인간 삶의 신비로운 궤도, 영원한 사랑 제42회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 「은비령」. 이 작품으로 인해 강원도에 새로이 ‘은비령’이라는 고갯길이 생겼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소설가 “나”는 아내와 별거 중으로 이혼 상태와 다름없다. 그런 나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그녀는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은비령에서 고시공부를 함께하던 친구의 아내였다. 그녀는 스칠 때마다 바람꽃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였다. 예상치 못한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마음 안의 소금 짐이 무거워진 나는 옛 친구가 죽은 장소인 격포로 향하다 눈 소식을 듣고 은비령으로 발길을 돌린다. 한계령을 지나 은비령 꼭대기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든 눈길에서 차가 고장 나고 시계마저 멈추어버린 다음 날, 나는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그녀를 은비령에서 만난다.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500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500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500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p. 201) 나와 여자는 별 마중을 하러 왔다는 뒷집 사내로부터 2천 5백만 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인간의 시간과 사람의 만남에 대한, 광활한 우주 속 정해진 공전주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별을 가슴에 담은 그 밤, 나는 “비껴 지나가는 별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여자에게 고백하고, 여자는 “별을 삼킨 듯한” 목소리로 2천 5백만 년 후를 기약하며 혜성의 꼬리를 따라 또 다른 우주로 고요히 떠나간다. 시계마저 멈추어버린 은비령은 그들이 짧은 한 생의 유한성을 뛰어넘게 해주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은비령은 우주가 품은 아득한 운명 안에서 그리움의 궤도를 아름답게 수놓으며 영원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곳, 무한한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곳으로 화한다. “……세상의 일이란 일은 모두 2500만 년을 한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500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2500만 년이 지나면 그때 우리는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다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길에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 다시 만나게 되고, 겪었던 일을 다시 겪게 되고, 또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을 다시 겪게 되는 거죠.” (pp. 292~293) 「영혼은 호수로 가 잠든다」에서도 가슴을 애잔하게 파고드는 신비의 여정이 펼쳐진다. 우연히, 어린 시절 동무 영해의 죽음을 알게 된 “나”는 그 친구와 함께 보냈던 대관령 산자락의 어렴풋한 향수를 추억하는 와중에 영해가 했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죽으면 제일 아끼던 거를 주고 가겠다던 영해의 말, 그리고 보현사 앞에서 우연히 마주쳐 경포까지 동행했던 그녀. 대관령에 누워 발아래 호수에 얼굴을 씻고 손을 씻고만 있을 것만 같은 어린 동무의 천진난만했던 미소와 함께 아릿한 예감이 번져오는 수작이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추천평> 소설다운 소설의 가뭄에 이 소설은 반가운 단비처럼 느껴진다. 연작장편 『수색, 그 물빛 무늬』를 통하여 작가는, 가두어도 가두어도 비집고 나오고 또 갖고자 하면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욕망의 생리를 보여준다. 그 욕망은 일상을 위태롭게 만들면서 동시에 일상에 활력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경계 밖에서 그 경계를 끝없이 허물면서 아름답지만 아픈 무늬를 만들어낸다. ‘수색’이라는 진부한 일상의 동네 또는 삶 속에서 ‘물빛’이라는 아름다움을 걸러내는 작가의 능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여섯 편의 연작에 그려져 있는 우리 내면의 물빛 무늬 욕망을 만나는 일은 오랜만의 행복한 소설 읽기가 될 것이다. - 이남호 (고려대 교수ㆍ문학평론가) 한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낯선 욕망의 무늬를 그려내는 ‘수색’ 연작소설 제27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 수록
<나무> 이 시대 대표 성장소설 작가 이순원이 그린 나무와 인간의 깊고 순수한 우정!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책따세, 전국 독서 지도교사가 추천한 청소년 필독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성장소설 작가 이순원의 2007년 작 『나무』가 다산북스의 청소년문학 브랜드 ‘놀’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평생 나무를 심고 정성으로 보살핀 어린 신랑과 그가 심은 밤나무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특유의 소박하고 정겨운 문체로 그린 작품으로, 백 년을 산 할아버지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의 섭리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번 개정판에는 이순원 작가의 따뜻한 글을 닮은 일러스트가 추가되어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 2007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청소년 권장 도서 ★ 2008 책따세 추천 도서 ★ 2008 전국 독서 지도교사 추천 우수 도서 ★ 2009 ‘책 한 권, 하나의 순천’ 프로그램 대상 도서 ★ 2014 구미시 ‘올해의 책’ 후보 도서
<말을 찾아서>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82권. 섬세한 감수성으로 소설의 미학적 특성을 뛰어나게 성취한 작품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연상시키면서 이야기에 ‘노새’가 등장하는데, 작가 이순원은 이와 달리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맺음과 그에 따라 어른으로 한층 성숙해가는 아들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설은 ‘미의 사제들’이라는 카테고리의 특성에 맞게 작가 고유의 언어적 수사력을 살리며 그 속에 따뜻한 소년의 감성을 담아내어, 인간적 성숙의 가치를 그려내었다. 연애와 일상, 사람과 관계 등 소소하지만 우리 삶의 결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이는 작품을 활발히 발표해 온 작가 이순원의 대표작이다.
<고래바위> 자연과 삶에 대한 정직한 성찰 작가 이순원은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으로 우리의 양심과 영혼을 치유해왔다. 자연과 삶에 대한 그의 정직한 성찰은 『고래바위』를 읽는 내내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 세상에 모든 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모인다’, ‘바위 위에 실처럼 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등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당연하고 정직한 구절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모든 물이 바다로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바위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금이 가고 부서지고 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정직하게 읽어내고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바로 ‘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이야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산 위의 고래바위가 바다로 가는 꿈을 꾸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룬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바로 ‘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산 위에 있는 고래바위가 어떻게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작가 이순원은 고래바위를 바다로 보내기 위해 기발한 발명을 해내거나 신비의 힘을 끌어오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자연이 바위에게 하는 일을 보이는 그대로 성찰하였다. 자연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기적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영혼을 가진 사람의 지혜와 사랑의 향기 ‘고래바위’라는 제목만 보아도 그의 지혜와 통찰력이 모두 자연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위에 이름을 지어주고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주 오래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를 읽으면 아주 오래된 영혼을 가진 사람의 지혜와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어쩌면 고래바위를 비롯한 모든 바위는 바다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고래바위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래바위가 거대한 몸집 그대로 바다로 가려고 했다면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고래바위에서 너럭바위로, 너럭바위에서 뾰족바위로, 뾰족바위에서 징검돌로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고래의 꿈을 잊지 않았기에 명개흙이 되어 바다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9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 이순원.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두 남녀의 가슴 시린 사랑을 그린 소설 「은비령」(1996)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은비령」은 가상의 지명인 ‘은비령(銀飛領)’을 새로이 실제 지도상의 공간에 이름 붙이게 만들었을 만큼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그 아름다운 소설을 써낸 작가가 한국 사회를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문제작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1992)를 써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일순 아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추리 기법의 사회 비판 소설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에 뽑힌 《비상구가 없다》의 원작이다.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을 구사한 이후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는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우선 이순원이 선택한 소재들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대담함에 놀라고, 다음으로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규탄하는 작가의 행간에서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날선 혐오감과 분노를 발견하며 다시 놀라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스토리DNA 열여덟 번째로 출간되는 이번 시리즈에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함께 작가 이순원이 직접 선정한 단편 「푸른 모래의 시간」(제1회 남촌문학상 수상)을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