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만점 철거농성장 - 유채림 펑크록 : 실천과 사람들 1> “시민들과 홍대 인디씬들이 뭉쳤다!” 동교동 삼거리 일대 재개발로 생존권마저 철거 위기에 처한 칼국숫집‘두리반’살리기 대작전 사막의 우물 ‘두리반’을 지키기 위한 531일간의 농성 소설처럼 쓴 작지만 커다란 그 승리의 기록! 〈실천과 사람들〉 시리즈의 네 번째 도서인 유채림 펑크록(錄) 『매력만점 철거농성장』이 출간되었다. 논픽션과 르포를 아우르며 현장성과 사실성을 담보로 야심 차게 기획한 〈실천과 사람들〉은 그동안 회자되긴 했으나 늘 주변부로 취급되어 사안의 심각성과 중요성마저 간과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중심으로 끌어들여 사회에 작은 불씨를 지피는 일을 해왔다. 2009년 용산참사 헌정 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삼참사역입니다』를 시작으로, ‘희망버스’ 기획 · 활동에 참여한 송경동 시인의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와 최근 대학 내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의 노동 인권을 다룬 『빗자루는 알고 있다』까지, 경제 성장을 어느 정도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위기와 퇴보설에 휩싸인 정국의 허와 실의 일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도서들을 선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에 작은 경종을 울렸다. 이번에 출간한 『매력만점 철거농성장』은 동교동 삼거리 일대 재개발을 둘러싸고 공권력과 거대 기업의 합작으로 서민들의 삶의 터전과 생존권마저 사지에 내몰린 어느 칼국숫집의 농성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지만 이는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공권력과 국가 폭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서민과 법의 보호로부터마저 요원한 우리 사회의 생존권 존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시민과 문화 · 예술가(활동가)들이 모여 연대한 새로운 형태의 농성 방식과 그 기록들. 관의 냉소와 무관심, 더딘 문제 해결 등으로 지난한 시간이었던 반면, 용역깡패와 기업의 외압 등으로 급박했던 531일간의 일들을 글로 꼼꼼히 기록해 그날의 사진들과 함께 일기처럼 모아 출간하였다. [두리반 :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 시민들과 홍대 인디씬들이 ‘두리반’에 둘러앉은 까닭은? 동교동 삼거리에 위치한 칼국숫집 ‘두리반’은 오고 가는 행인들과 일대 회사원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평범한 음식점이었다. 손님들에게도, 이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의 네 식구에게도 그들의 곤궁한 배를 채우고 삶을 영위해가기 위한 ‘사막의 우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곳 두리반에 더 이상 칼국수 손님들이 아닌 용역깡패와 건설사 관계자들이 무단으로 드나들고, 급기야 이에 대항한 시민연합군(?)이 모이기 시작했다. 과연 홍대 앞 사거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07년 12월, 이 일대에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들어선다고 하여 졸지에 노다지가 된 동교동 167번지 일대를 건설사가 시세의 열 배를 주고 두리반 일대를 매입했다. 두리반이 있는 3층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렵게 파내려가 그나마 한바가지 물을 힘겹게 길어 올릴 수 있는 ‘사막의 우물’을 수포로 만들기 시작했다. 2008년 봄부터 11세대들의 상가 세입자들이 법정 싸움을 진행했지만 판사는 건설사 측의 손을 들어, 건설사는 세입자들에게 이사 비용 300만 원만을 줄 테니 생계 터전을 버리고 떠나가라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어김없이 용역깡패가 동원되는 등 온갖 외압이 들어오면서 아무 보호와 보상을 바랄 수 없는 한 소시민의 절규 어린 농성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듯,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많은 인디씬들과 예술가, 활동가, 수많은 시민들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한 가정의 삶의 터전만을 위함이 아닌, 이 작은 일이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용삼참사가 그랬듯이, 기륭전자 · 대추리 · 쌍용자동차가 그랬듯이……. 날마다 탄압, 날마다 농성, 날마다 축제! 우리가 연대할 수 있다면,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이글을 쓴 저자 유채림은 ‘두리반’ 사태의 당사자이자, 중견 소설가로 활동 중인 작가이다. ‘두리반’ 사태가 시작되면서 그 즉시 소설가는 생업인 편집일을 내려놓고, ‘투쟁가’가 되어야 했다. 그가 늘 작품으로 그려냈던 ‘픽션’의 세계가 눈앞에서 ‘논픽션’이 되는 순간을 처절히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작가의 방식으로 싸우며 공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용산참사의 선례가 일반 시민들과 홍대 인디씬을 중심으로 한 전방위 문화 · 예술 활동가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던 것일까. 하나둘 국가 폭력이 장악하려는 나약한 한 가정의 우물을 수호하기 위해 ‘두리반’에 모이기 시작했다. 본명이 아닌 별칭으로 불리는 흑마늘, 대원군, 멍구, 한받, 엄보컬, 김선수 들 같은 인디씬 예술가들이 거대 자본에 맞서 위장 크림을 얼굴에 덧바르고 게릴라처럼 나타났다. 이들은 인정 없는 국가 폭력에 맞서 새로운 방식의 퍼포먼스와 문화 운동의 방식으로 ‘비폭력 문화 농성’을 전개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다큐멘터리’가 되었고, ‘칼국수 음악회’, ‘두리반 문학포럼’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 문화 운동으로 기획되어 대중들의 참여와 공감을 이끌어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건물이 아닌 소시민의 가정과 삶을 몰살하는 철거에 항거한 ‘두리반’에서 일어난 531일간의 농성은 새로운 운동 방식의 한 전형을 보여줬고, ‘85호 타워크레인’ 희망버스의 전범과 같은 모델이 되어 연대의 힘과 저력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논픽션임에도 소설가답게 이 같은 531일간의 농성을 그만의 필체와 입담으로 그 연대의 과정과 사건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묘사했다. 사막과 같은 이 땅에 더 많은 ‘두리반’ 같은 곳이 생기길 염원하며, 이 사회를 지탱하는 99%의 서발턴들의 생명력과 희망의 불씨를 보여준,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을 ‘작가의 방식’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그 산물이 이 책, 유채림 펑크록(錄) 『매력만점 철거농성장』이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 39년 동안의 살인누명! 오쿠바라 불린 사나이의 인생 분투기 소머리 마을의 강간치사 “열흘 안에 범인을 잡아라!”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는 평범한 한 남자가 여자아이 강간살인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뒤 무려 39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사건을 다룬다. 이 이야기는 올해로 82세가 된 정원섭 목사(작중 정원탁)의 실화다. 1972년 9월. 춘천시 우두동에서 9살 여자아이가 성폭행당한 채 시체로 발견됐다. 진척 없는 수사에 국민들은 공분했고, “열흘 안에 범인을 잡지 않으면 관계자는 모두 모가지”라는 대통령의 검거령이 떨어졌다. 열흘 뒤 만화방 주인이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열흘 만에 범인을 체포한 영웅담으로 알려졌던 ‘춘천시 우두동 강간살인사건’은 사실 열흘 만에 ‘범인을 만들어낸’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한부 검거령에 겁에 질린 경찰은 뚜렷한 증거 없이 만화방 주인을 범인으로 ‘찍어’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다. 증거는 체포 이후 만들어냈고, 주변인들을 협박하여 짜맞추기 식 수사로 위증을 강요했다. 검찰은 경찰의 증거를 넘겨받아 그대로 기소했으며, 사법부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뒤 2심에서 제출된 과학적 증거들을 모두 기각했다. 결국 만화방 주인은 대법원 판결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범인이 없으면 범인을 만들고 증거가 없으면 증거를 만드는 창조수사. 한 사람의 일생을 짓밟고 수많은 사람들을 속인 대국민 사기극! 각본을 경찰과 검찰이 썼다면, 감독은 사법부였던 셈이다. “나는 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신은 무력했고 법은 실패했다. 무고한 사람이 옥살이로 젊음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었다. 명예가 더럽혀졌으며 인권을 유린당했다. 사흘간의 고문, 15년 동안의 수감, 세 번의 자살시도와 39년간의 누명 뒤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한 남자의 거대한 분노와 처절한 슬픔이다. 성경에 바로 오쿠바의 경우와 꼭 닮은 이야기가 있다. 구약성경에 있는 <욥기>의 내용은 신이 욥이라는 자에게 건강과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는 고난을 주어 그의 신앙을 시험한다는 것이다. 모자람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목사를 준비했던, 그러나 파란만장한 노정을 지나 무기수가 된 오쿠바의 삶은 욥의 그것과 궤적을 같이한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던 욥과 달리 오쿠바는 신을 의심하며 이렇게 말한다. “악이 신을 압도했다. 신은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그 무기력한 신을 왜 믿어야 한단 말인가!” 신이 요구하는 신앙은 믿음의 근거도 없고 의심할 이유도 없는 맹목적인 신뢰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조건은 인간에게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마침내 오쿠바는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모습에 등을 돌리곤 목을 맸다. 그러나 오쿠바를 버린 것이 신이라면 구원한 것도 신이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쿠바는 자신을 위로하고 돕던 사람들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느껴 신앙으로 회귀한다. 오쿠바가 다시 만난 신은 통제보다는 자율을, 징치보다는 용서를 존중하는 존재다. 강요 대신 사랑으로 설득하며 피조물이 바른길로 가도록 무한히 기다리는 존재다. 결국 오쿠바는 모진 목숨을 이어 무려 39년의 세월이 지나 마침내 진실이 밝혀진 날 “무죄 판결이 신의 은총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해준 것이 은총이다.”라고 말한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는 한편으로는 전근대적이고 부조리한 한국 사회의 공권력에 대한 고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종교적 질문에 대한 이야기다. ‘신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 신앙의 올바른 모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대답이 또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큰 주제라 할 수 있다. 80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어금니 깨물고 버텨내다 오쿠바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그는 강간살인죄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그런데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의 줄거리는 단 세 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이 늘 그렇듯 저 세 줄의 문장은 오쿠바에 대해, 그의 삶에 대해, 그가 겪은 수많은 고난과 시련들에 대해 그 무엇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영국이 낳은 영화계의 거장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멀리서 볼 때 어처구니없고 실소를 자아내는 오쿠바의 삶은 가까이서 바라보면 신도 법도 가족도 버린 비참한 어떤 남자의 이야기다. 이 책은 정원섭(작중 정원탁)이 어린 시절부터 오쿠바(일본어: 어금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사연, 이유가 없는 수많은 죽음들을 마주하고 종교로부터 멀어진 사정, 가정을 꾸렸으나 첫아들을 병으로 잃은 아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세 번이나 목을 맨 과정, 무죄가 밝혀진 뒤 지금까지도 국가와 싸우는 그의 투쟁을 모두 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오쿠바라는 인간의 삶을 독자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듯 가까이서 느끼게 만든다. 오쿠바의 일생을 속속들이 읽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이 결국 지난 80년 동안 우리 한국인이 겪은 역사와 현실의 한 표본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을 맞이하고, 6.25전쟁과 4.19혁명을 겪으며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신통치 시절을 지나 부당하게 옥살이를 한 뒤 이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그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굽이치는 물결을 지나오며 역사와 권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 신음했던, 그리고 이제 그 상처를 되살펴 보듬으려 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오늘이라 할 수 있다. 나쁜 공권력은 혼자인 인간을 노린다! ‘칼국숫집 두리반 농성’의 주인공, 유채림 작가가 이야기하는 연대의 가치 눈여겨 볼 것은 이 책의 작가 유채림이다. 유채림은 2010년 동교동 삼거리 일대 재개발을 둘러싼 공권력과 거대 기업(GS건설)의 합작으로 서민들의 삶의 터전과 생존권이 사지에 내몰렸던, 그러나 홍대 음악인들 및 예술인들과의 연대로 531일 만에 집과 일터를 지켜낸 ‘칼국숫집 두리반 농성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즉 ‘공권력에 짓밟힌 개인의 삶’이라는 테마를 품은 우리 현대사 속의 한 비극적인 사건을 실제로 오늘날 공권력에 의해 억압당했던 작가가 다시 조명하여 써내고 있는 것이다. 유채림이 쓴 오쿠바의 이야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권위에 엎드리고 이기심에 물든 시시한 인간들의 사회가 무력한 한 개인에게 가하는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폭력이다. 이 이야기는 전근대적이고 인권개념이 희박한, 그리하여 한 개인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한국사회 공권력의 어두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주었다. 용산 철거민 사망, 세월호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어처구니없고 일어나서는 안 될, 그러나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 공권력의 부조리.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는 그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또 다른 오쿠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경고문 같은 작품이다. 오쿠바는 고난의 순간에 자신을 믿고 함께해주었던 여러 사람들의 얼굴에서 신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작가 유채림 역시 공권력의 횡포에 대항하여 ‘연대’의 힘으로 맞서 이겨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와 혀가 있는 한 공권력은 결코 개인의 삶을 무자비하게 억압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비극을 남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외면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인간 공동의 상처로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넥타이를 세 번 맨 오쿠바>를 읽으며 이러한 메시지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