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눈물> *오동도 동백꽃과 ‘좌익과 우익’ 1..내가 『여수의 눈물』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내 스스로 숙명처럼 정해 놓았던 ‘숙제하기’였고, 나머지 하나가 어느 날 모 박물관에서 목격하게 된 사진 한 장이었다. 누렇게 퇴색한 70여 년 전 흑백사진이었다. 어느 경찰서 뒤뜰이었고, 앵글 안에 들어 있는 스물여덟 명 모두가 누더기를 걸친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여름옷을 켜켜이 껴입은 탓이었지만, 그보다 생포되어 막 끌려온 터라 자신들의 생존문제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더 긴장된 초초한 모습이었다. 소위 빨치산으로 불리는 지리산 공비들이었다.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형형했다. 닿기만 하면 녹여 버릴 듯이 예리하고 매서웠다. 비록 육신의 자유를 잃었다고 해서 투쟁정신까지 죽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열렬하고 더 팽팽한 살아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에 매료되었다기보다 함몰했다고 해야 옳다. 어쩌면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까. 저 형형한 눈빛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무엇을 의미하기에 저처럼 레이저광선 같은 파란빛을 띠고 있을까. 과연 저 눈빛을 형상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2.1948년 10월 18일, 나는 여수 공화동에 있었다. 여천 군청청사 뒤쪽이 내가 살았던 터전이다. 종고산 쪽으로 난 골목을 조금만 올라가도 동백꽃 만발하는 오동도가 선명하게 보였고, 그 너머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며, 내 유아기를 보냈던 남해 섬이 빛나는 청람색으로 병풍인 양 펼쳐져 있었다. 이른바 ‘여수반란사건’의 현장이었다. 우리 나이로 다섯 살이고, 만으로 네 살짜리 철부지였지만 나는 그날 새벽 콩 볶는 총소리를 들었고, 포승줄에 묶인 채 총살당하는 제복 입은 남자들의 죽음도 보았으며, 태극기인지 인공기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들 속에 나도 끼어 강물 흘러가듯 그렇게 휩쓸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다음 날인가. 철모에 흰 띠를 두른 소위 말하는 진압군들이 무더기무더기 상륙했고,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다. 군인들이 지른 불이었다. 시민들을 빠짐없이 강제 집합시켜 놓고 빈 집에 석유를 끼얹고 불씨를 던진 것이다. 우리 가족도 공터에 도열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있었고,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업은 채 급히 나오면서 주섬주섬 챙긴 보따리를 가슴에 움켜 안고 있었다. 군인들은 함부로 총을 쏘아 댔다. 실제로 아무 지시 없이 대오를 빠져 달아나는 청년을 쏘아 쓰러뜨리기도 했다. 총 끝에는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대검이 꽂혀 있었다. 마침내 우리 가족 차례였다. “그게 뭐야?” 나이 많지 않은 군인이었는데 반말이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어머니는 대답 대신 아버지만 바라보았다. “그거시 뭐시냐…….” 아버지가 대신 설명하기 전에 대검이 날아와 어머니의 보따리를 찔렀고, “오메, 오메야!” 어머니의 비명과 함께 보따리가 풀리면서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식구들이 쓰던 놋수저와 책 두 권이 전부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성경과 찬송이라고 해야 옳았다. “예수쟁이야?” 군인이 물었다. “네, 예수 믿는 신잔디요.” “진작 말하지! 이리로 나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뒷줄, 앞줄, 옆줄 식구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 뒤로 나는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누란의 미녀> 나라 잃은 위구르의 비극과 우리의 백년 기억 『누란의 미녀』는 백시종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2019년 여름 완성한 전작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중국 신장성의 위구르족이 처한 현실이 우리의 일제강점기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끼던 중 실크로드 탐사를 통해 만난 고대 누란왕국의 미라 ‘누란의 미녀’에서 모티브를 얻어 실제로 중국 내의 화약고로 알려진 신장성 위구르 민족의 가련하고 처절하고 엉성한 저항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대기업 에벤에셀의 지원을 받아 신강성 선교사로 파견된 조진표가 그 주인공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처우 등 지극히 부정한 방법으로 재벌군에 올라선 에벤에셀과 노동자들의 투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속절없이 희생되는 위구르족의 저항이 이 소설의 주테마이다. 종교와 국경을 넘어서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인 양 신선한 감동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실크로드의 광대함과 등장인물의 다양한 개성을 더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컬러삽화 12점을 책 속에 수록했다. 삽화는 대한민국 디자인전 산업부장관상 수상 작가이며, 전 인하전문대 이준섭 교수가 맡아 주었다.
<호아저씨를 기다리며>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는 오늘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땅에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큰 일물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아주 특별한 소설이다. 나는 『학원』이라는 학생문예지를 매개로 하여 조국상과 만나고, 문학지망생이라는 동질성에 이끌려 애증 어린 우정을 평생 동안 이어간다.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조국상으로부터 ‘호치민 전기’를 마무리해 달라는 유언을 떠맡게 된다. 조국상이 집필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호치민 전기’는, 이 땅에 그런 큰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조국상의 염원이자 나의 염원이기도 하다. 소설 『호 아저씨를 기다리며』는 나와 조국상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별하는 데서 끝을 맺지만, 나와 조국상의 염원 때문에 시작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끝내서도 안 되고, 끝날 수도 없으며, 끝나지 않은 소설인 것이다. 전국 중고교 문예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한 상경 길의 기차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조국상은 어른 같은 고교생 시인이었다. 그리고 조국상은 그때부터 큰 인물을 좇아서 섬기는 우상 꿈꾸기였으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김대중 국회의원을 찾아갔다가 허탕을 친다. 나는 조국상은 반국가사범으로 퇴학을 당하고, 대학 진학을 위한 상경길에 조국상을 찾아갔던 나는 그의 부친 수술비로 입학금의 절반을 내놓게 되지만, 추후 그중 절반이나 회수하게 되었는지 흐지부지되었다. 나는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어디론가 잠적했던 조국상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나와 잠시 마주쳤으나 김후보 낙선 뒤 다시 사라지고 만다.
<강치> 독도의 날조된 역사적 진실을 심도있게 그려낸다! 백시종 장편소설『강치』. 탄탄한 주제와 화려한 문체로 알려져 있는 작가 백시종이 우리 역사가 날조된 것은 아닌지, 시대적인 사회정의는 살아있는지, 그 역할은 또 무엇인지에 대하여 심도있게 파헤친 소설이다. 1945년의 독도에서 2013년의 독도가 존재하기까지 그곳에 얽힌 사랑과 배신, 그리고 조작으로 일관된 부적절한 애국의 집단 심리가 빠른 템포로 전개된다. 신문사를 정년퇴임하고 평범한 일상을 사는 나에게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온다. 새로운 국가영웅으로 추앙받는 독도의의용군의 업적도, 활약도 실상을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직 경찰이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민간인들에게 지급하는 호국연금에 눈이 어두워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이라고 사회전반이 그를 묵살하고 매도해마지 않는데…….
<오옴하르음악회> 한국문하의거장 백시종작가 장편소설. 혹 또 한 번의 세계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종교로부터 촉발된 전쟁일 것이라고들 한다. 한편에서는 종교 간 화합을 외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갈등의 정점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이슬람과 기독교는 정말 화합하기 어려운 것일까? 혹 이것은 다른 쪽에 대한 무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두 종교 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이번에는 종교 간 화합의 방법에 관해 말하고 싶다. 작가는 글을 통해 언어를 생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서일까? 소수언어를 살릴 방법에 관해서도 말하고 싶다. 등단 50년, 아직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소설가 백시종이 장편소설 『오옴하르 음악회』를 선보인다. 추천평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인물의 긍정적 힘이 강력하게 다가왔고, 우리 문학에도 이런 소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자기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해가는 방식은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모범이 될 것이다. 거기에 소소민족(느굼바이)의 언어를 지키려는 발상이 다양성을 옹호하며, 차이를 긍정하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도 높이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사막에서 모슬렘과 크리스천이 화해하는 대목은 세계문학사적으로도 드문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김인호 (문학평론가)
<돈황제> 백시종 장편소설 『돈황제』. 당신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유란 돈을 가진 만큼만 허용된 자유이다. 돈을 가진 자는 황제처럼 살고 돈이 없는 자는 그들을 꿈꾸며 산다. 화폐의 신이 부여해 준 권력이 만들어 낸 돈황제! 화려하게 번쩍이는 갑(甲)질의 시대, 이건 우리의 이야기다. 왕 회장 입맛에 맞는 거짓 글들을 쓰는 전직 삼류작가 권도혁, 화약 폭발을 막아 포상을 받는 기쁨에 젖었다가 하루아침에 ‘팽’ 당한 민득구, 어느 날 갑자기 ‘회장님이 부르셔’ 한마디에 목욕재계를 하고 남몰래 왕 회장 방으로 들어간 식모 조은실, 회사를 상대로 끝을 모를 싸움을 하는 노조위원장 한광필…… 왕 회장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시대 을(乙)들의 삶!
<팽> <이명박 회고록>을 검증한다! MB 잡을 소설이 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인 요즘,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소설이 출간됐다. 공교롭게도 출간일이 같다. 특히 저자가 이 전 대통령과 함께 현대그룹에서 10년간 근무하다 하루아침에 파면돼 『돈황제』를 써서 세간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백시종 씨여서 더 흥미롭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것.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아주 시의적절한 비교 자료가 될 수 있다. 비록 소설이긴 해도 실제 인물을 다룬 만큼 상당 부분 사실에 근거해서 용의주도하게 씌어졌기 때문이다. 회고록 중 ‘정주영 회장과의 결별’ 부분이 대표적인 케이스. 회고록에서 MB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대통령 출마를 ‘재벌의 정치 참여는 안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반대했고 결국 그 때문에 결별하게 됐다고 썼지만, 소설의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정 회장의 대권 도전 당시 MB는 출근해서 다른 업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코리아 리서치의 여론조사에만 매달렸다는 것. 조사 결과 정주영 회장이 3위에 랭크돼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자 그를 배신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회고록 첫 장의 제목 “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는 부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소설에 따르면 MB는 현대그룹 재직 당시부터 서울시장 출마를 공언하고 다녔다고 한다. 서울시장직이 대권을 향한 사전포석이라는 정계의 일반적인 시각과 실제 그의 정치적 행보에 견줘보면 독자들의 의심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을 떠난 후 민자당의 YS가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는 대목도 소설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 물론 자서전 격인 회고록과 문학작품인 소설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은 스케일과 디테일의 차이만큼이나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일한 팩트를 들여다보는 시선의 각도나 가공에서 그 둘의 차이와 엇결을 톺아보는 재미는 오롯이 독자의 특권이다. 더욱이 4대강이나 자원외교에 대한 국정조사가 잡혀 있는 미묘한 시점에 출간된 회고록이 아닌가. 따라서 공적 영역에 대한 검증의 확장으로서 회고록의 신뢰도를 따져보는 것은 오히려 국민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진정으로 겨냥하는 바는 비단 이런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재계의 제왕, 정계의 제왕이 되기 위해 쳐내야 했던 수많은 경쟁자들과 그 아랫줄에서 힘없이 ‘팽(烹)’ 당한 사람들, 무수한 ‘을’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로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가차 없이 팽 시키는 우리 사회의 약탈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작가 스스로가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파면당했다. 표면적으로는 ‘왕 회장’(정주영 회장)이지만 실제적으로 ‘엠비유’(MB) 라인에 의해 내쫓겼다. 왕 회장이 사우디 고위관료에게 건넨 뇌물이 문제시되자 대신 2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한 정갑성 전무도 중동 건설 붐을 일으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엠비유의 경쟁자라는 이유로 여지없이 ‘팽’ 당한다. 왕 회장이 점찍은 이국의 여자가 깜짝 놀란 만한 ‘화대’ 제안에도 “노땡큐!”를 외치며 황성택 상무의 호텔방에 들어갔다 하여 런던의 국제금융통이었던 황 상무도 ‘팽’ 당한다. 종래에는 그런 왕 회장조차 대권을 앞두고 엠비유에게 ‘팽’ 당하고 만다. ‘팽’ 시킨 다음의 사후조치는 더욱 잔인하다. 작가의 분신인 박종산이 집필한 『돈황제』를 막기 위한 조치는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고 기사와 광고를 막는다. 그것도 부족해 지방지, 잡지사, 서점가를 망라하여 전방위적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이렇게 약육강식의 비정한 논리가 판치는 인간정글. 세상은 점점 위계화되고, 양극화의 골은 더욱 깊어간다. 땅콩회항에 비유되는 ‘갑질’의 횡포 아래서 다른 길은 없는가? 작가는 독자에게 차갑게 되묻는다. 싸우면서 닮아가듯이,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팽 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고. 정녕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더 팔아야 할 것이 남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