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몽룡 춘추전국시대 역사소설 동주열국지 1회-2회> 풍몽룡 춘추전국시대 역사소설 동주열국지 1회 2회 1 한문 및 한글번역 예시문 第一回 周宣王聞謠輕殺 杜大夫化厲鳴冤 鳴冤: 원통함을 호소함 제일회 주선왕문요경살 두대부화려명원. 제 1회 주선왕이 참요를 듣고 경솔히 죽여서 두대부[두백]가 사납게 변화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며 울게 되다. 詞 詞(말씀, 알릴 사; ⾔-총12획; ci) 曰:道德三皇五帝三皇五帝: 황은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를 말하며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또는 泰皇)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또한 삼황 가운데 여신인 여와씨 대신 수인씨(燧人氏)와 축융씨(祝融氏)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해 주었으며, 신농씨는 농사법을 전해주었다. 여와씨는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사마 천(司馬遷)은 3황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이며, 별도로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功名夏後 後(뒤 후; ⼻-총9획; hou)의 원문은 后(임금 후; ⼝-총6획; hou)이다. 商周; 사왈 도덕삼황오제 공명하후상주. 글은 다음과 같다 :도와 덕은 삼황오제요, 공적과 명성은 하나라 뒤의 상나라와 주나라이다. 英雄五霸 五 霸(으뜸 패; ⾬-총21획; ba,po) :다섯 사람의 패자(覇者).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을 일컬음. 또는 송나라의 양공을 제외하고 오(吳)나라의 임금인 합려(闔閭)를 오백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임금 합려와 월(越)나라의 임금 구천(句踐)을 오백으로 보기도 함. =五伯 鬧 鬧(시끄러울 료{뇨,요}; ⾾-총15획; nao) 春秋,頃刻興亡過手過手: 바둑, 장기(將棋) 따위에서, 지나친 수 (돈·재물 등을)취급하다. 출납하다. ! 영웅오패뇨춘추 경각흥망과수. 영웅의 5패가 춘추시대에 싸우니 경각간에 흥망이 역사에 취급되었다. 青史 靑史 :역사(歷史). 기록(記錄) 幾行名姓,北邙 郊(성 밖 교; ⾢-총9획; jiāo)의 원문은 邙(산 이름, 고을이름 망; ⾢-총6획; mang)이다. 北邙山:중국 하남성[河南省] 뤄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 뤄양은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곳으로 그만큼 뤄양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이곳에는 한나라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명사들의 무덤이 많다. 이와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無數荒邱 丘(언덕 구; ⼀-총5획; qiū)의 원문은 邱(땅 이름 구; ⾢-총8획; qiū)이다. ; 청사기행명성 북망무수황구. 청사에 몇 줄 이름과 성을 남겼지만 북망산에 무수한 황무지 언덕의 무덤만 되었다. 前人田地 田地 :논과 밭, 경작(耕作)하는 땅 後人收,說甚龍爭虎鬬 龍爭虎鬪(용쟁호투) ; 천하의 영웅이 일시에 겨룸 。 전인전지후인수 설심용쟁호투. 앞 사람은 가졌던 땅을 뒷 사람이 수습하였으나 영웅이 심하게 용이 다투고 호랑이가 싸움을 말한다. 話說周朝,自武王[武王, ?~BC 1043 ?] 무왕(武王)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인 호경(鎬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아버지인 희창(姫昌)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상(商)의 주왕(紂王)에게 간언(諫言)을 하다 살해된 비간(比干)을 다시 장례 치르고, 유폐(幽閉)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상(商)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부족이나 공신(功臣)들에게 대규모로 분봉(分封)하여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다른 부족들에 분봉하여 신농(神農)의 후인(後人)들은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인들은 계(蓟, 지금의 天津 蓟縣)에, 요(堯)의 후인들은 축(祝, 지금의 江蘇 赣榆)에, 순(舜)의 후인들은 진(陳, 지금의 河南 淮陽)에, 우(禹)의 후인들은 기(杞, 지금의 河南 杞縣)의 제후로 각각 봉(封)했다. 또한 상(商)의 유민(遺民)을 통제하기 위해 주왕(纣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상(商)의 수도였던 은(殷)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주왕(纣王)의 이복형인 미자계(微子啓)에게 상(商)의 제사(祭祀)를 잇도록 하며 송(宋, 지금의 河南 商丘)의 제후로 봉(封)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 주위에 자신의 3명의 아우들을 분봉(分封)하였다. 관숙(管叔) 희선(姬鲜)을 관(管, 河南 鄭州)에, 채숙(蔡叔) 희도(姬度)를 채(蔡, 지금의 河南 上蔡)에, 곽숙(霍叔) 희처(姬處)를 곽(霍, 山西 霍州)의 제후로 봉했으며, 이를 ‘삼감(三監)‘이라 하였다. 또한 주(周) 건국에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에게 제(齊, 지금의 山東 營丘)를, 주공(周公) 희단(姫旦)에게 노(魯, 지금의 山東 曲阜)를, 소공(召公) 희석(姫奭)에게 연(燕, 지금의 河北)을 각각 분봉(分封)하였다. 하지만 무왕(武王)은 주(周)를 건국한 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성왕(成王)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이 되어(주공이 왕위를 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통치하였다.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과 함께 요(堯)나 순(舜), 하(夏)의 우(禹), 상(商)의 탕왕(湯王)과 더불어 후대(後代)에 성왕(聖王)으로 숭앙(崇仰)되었다. 伐紂 이름은 제신(帝辛), 제신수(帝辛受)이다. 아버지 제을(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상(商)나라의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군사적 재능이 있어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향락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혀고 급기야 애첩 달기(妲己)에게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인육이라고도 함)를 매달아 놓고[肉林] 달기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주지육림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특히 자신에게 충심으로 간언하였던 왕자 비간(比干)을 죽였다. 7년에 걸쳐 높이 180m, 둘레 800m의 호화궁전 녹대(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제후들의 맹주 격인 서백의 아들 발(發)이 여상 강태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워 무왕이 되었다. 주왕은 녹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 ,即天子位,成康2대 주 성왕(周成王) 희송(姬誦) 기원전 1045년 ~ 기원전 1008년 제3대 주 강왕(周康王) 희쇠(姬釗) 기원전 1008년 ~ 기원전 982년 성강지치(成康之治) -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아들 성왕과 성왕의 아들 강왕이 이룩한 치세로 정확한 연대는 확실치 않고 개략적으로 기원전 11세기 초에서 말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繼之,那都是守成 守成 :조상(祖上)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가업을 지키다. 앞사람이 이룩한 사업을 유지해 나가다. 保業守成 사업을 지키고 성과를 유지하다. 令主 令主: 좋은 주인 。 화설주조 자무왕벌주 즉천자위 성강계지 나도시수성령주. 주나라 왕조를 말함에 무왕이 주왕을 벌함으로부터 천자가 즉위하니 주나라 성왕과 강왕이 계승하니 이들은 모두 지키고 완성하는 좋은 군주가 되었다. 又有周公주공: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당시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다시 동방을 원정(遠征)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부근 낙읍(洛邑:成周)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주공은 상족을 회유하기 위하여 상(商)의 고지(故地:商丘)에 주왕(紂王)의 형 미자계(微子啓)를 봉하여 송(宋)나라라 칭하고, 아들 백금(伯禽)을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중원(中原)의 요지에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召公 召公:성(姓)은 희(姬), 이름은 석(奭)이다. 기원전 11세기 때의 사람으로 주(周) 왕실(王室)의 일족(一族)이다. 소(召, 지금의 陝西 歧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여 소공(召公)이라고 부르며, 소공석(召公奭), 소백(召伯), 소강공(召康公), 주소공(周召公)이라고도 한다. 주(周) 성왕(成王) 때에 삼공(三公)의 위(位)에 올랐으며, 태보(太保)의 직책(職責)을 맡았다.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연(燕, 지금의 河北 북부)을 분봉(分封)받아 전국시대(戰國時代)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인 연(燕)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하지만 소공(召公)은 직접 연(燕)을 다스리지는 않고, 호경(鎬京, 지금의 陝西省 長安縣)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자(長子)인 희극(姬克)을 계(薊, 지금의 北京)로 보내 다스렸다. 소공(召公)은 주(周) 문왕(文王)부터 강왕(康王)까지 4대에 걸쳐 정사(政事)를 돌보았는데, 특히 무왕(武王)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주공(周公) 희단(姬旦)과 함께 훌륭히 보필하여 주(周) 왕조(王朝)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소공(召公)과 주공(周公)은 각각 주(周)를 동서(東西)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주공(周公)은 낙읍(洛邑, 지금의 河南省 洛陽)에 머물면서 동쪽 지역과 제후(諸侯)들을 관장하였고, 소공(召公)은 서쪽 지역을 다스렸다. 소공(召公)이 다스렸던 지역에서는 후백(侯伯)부터 서인(庶人)까지 모두 제 할 일을 얻어 실직자가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범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곳곳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는데, 감당(甘棠) 나무 아래에서 백성의 송사(訟事)를 듣고 공정하게 해결해 주어 후대(後代)에도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대하듯 그 나무를 대하며 그의 선정(善政)을 기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어진 정치를 펼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감당지애(甘棠之愛)’, ‘감당유애(甘棠遺愛)’ 등의 성어(成語)가 비롯되었다. 그리고 <시경(詩經)>에도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지내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꺾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쉬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휘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즐기셨던 곳입니다.(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 蔽芾甘棠 勿翦勿拜 召伯所說)”라는 민요(民謠)가 실려 있다. 、畢公 무왕이 즉위하자 태공망(太公望 : 성은 강(姜), 씨(氏) 는 여(呂), 이름이 상(尙), 민간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제(濟)에 봉해졌다.)을 사(師 : 군사참모)로 삼고 주공( 周公 : 이름은 단(旦), 문왕의 아들, 무왕의 동생, 곡에 봉행져 노공(魯公)이 되었으나, 임지로 가지 않고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했다. )을 보(輔)로 임명했으며 소공(召公 : 문왕의 서자, 召에 봉해져 소공이라고 불린다. 연(燕)의 시조.)과 필공(畢公 : 이름은 高, 문왕의 아들. 필에 봉해짐)등은 왕을 보자하며 문왕의 위업을 배우고 확대하게 하였다. 、史佚 成王與叔虞戱 削桐葉爲珪 以與叔虞曰 以此封若 [성왕여숙우희 삭동엽위규 이여숙우 왈 이차봉약] 성왕이 숙우와 더불어 놀이를 할 새, 오동잎을 깍아서 규를 만들어서 숙우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써 너를 봉하노라 하였다. 史佚因請擇日立叔虞 成王 曰 吾與之戱耳 [사일인청택일립숙우 성왕 왈 오여지희이] 사일이 이 청으로 인하여 날을 가려서 숙우를 봉할 것을 청하니 성왕이 이르기를 내가 그와 함께 장난했을 따름이다 史佚(편안할 일; ⼈-총7획; yi) 曰 天子無戱言 於是遂封叔虞於唐 [사일 왈 천자무희언 어시수봉숙우어당] 사일이 이르기를 천자에게는 희언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마침내 숙우를 당나라에 봉했다. 等一班賢臣輔政,真個文修武偃 武偃(쓰러질 언; ⼈-총11획; yǎn)文修 :wǔ yǎn wen xiū 【解釋】:文治已實行,武備已停止。形容天下太平。亦作“文修武偃”。 【出處】:明湯顯祖《還魂記·榜下》:“正此引奏,前日先生看定狀元試卷,蒙聖旨武偃文修,今其時矣!” ,物阜 阜(언덕 부; ⾩-총8획; fu) 物阜: products abound and people have an abundance of everything; a wealthy nation with plenty of products 民安。 우유주공 소공 필공 사일등 일반현신보정 진개문수무언 물부민안. 또한 주공, 소공, 필공, 사일등이 일반의 현명한 신하로 보필을 하여 진짜 문장을 닦고 무력을 쉬게 하니 만물이 풍부해지고 백성이 편안해졌다. 自武王八傳至於夷王 희섭[姬燮] - 이왕 夷王 885 BC-878 BC ,覲禮 覲(뵐 근; ⾒-총18획; jin)禮:제후가 천자를 뵙는 의식 不明,諸侯漸漸強大。 자무왕팔전지어이왕 근례불명 제후점점강대. 주나라 무왕에서부터 주나라 이왕까지 8세대를 전하며 근왕의 예의가 밝히지 않고 제후들이 점점 강대해졌다. 到九傳厲王 백성의 입을 막기는 강물을 막기보다 어렵다. 즉위 30년이 된 주여왕(周厲王)은 재물을 지나치게 탐하고 정치의 도가 문란했을 뿐만 아니라 오만방자하여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다.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질책하게 되자 소공(召公)이 나서서 간언을 했다. “백성들이 모두 도저히 왕의 포악함을 참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화가 잔뜩 난 여왕은 위나라에서 무당을 징발하여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게 하고, 무당이 고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잡아서 죽여 버렸다. 비방하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제후들은 점차 조정으로 배례를 드리러 오지 않게 되었다. 즉위한 지 34년이 되자 여왕의 가혹한 정치는 더욱 심해졌다. 누구도 나서서 그에게 간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길거리에서 만나도 고작 눈빛으로만 의사표시를 했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여왕은 소공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모두 없앴더니, 감히 무슨 말이든 하는 사람이 없어졌소이다.” 소공이 대답했다. “그것은 백성들의 입을 막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것은 흘러가는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흐르는 물을 막으려면 수구를 만들어야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난리를 방지하려면 사람들을 길가에서 피하게 하거나 물길을 터주어야 합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언로를 소통시켜주어 마음 놓고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자가 조정을 다스리는 것도 공경대부들이 조정에 나와 시편을 읊조리며 풍자를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또 악사가 나와 민정에 대한 악곡을 연주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태사(太史)는 문헌과 전적을 들어서 귀감이 되는 말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태사(太師)는 규범이나 삼가야 할 것을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수사(瞍師)1)는 공경대부들에게 시편을 낭송해주어야 하며, 몽사(矇師)2)는 규범과 경계가 되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백관은 조정의 득실을 풍자하고, 평민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을 수가 있어야 하며, 근신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간언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왕과 제후의 친인척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공개적으로 비판받아야 고쳐질 수가 있으며, 태사(太史)와 태사(太師)가 교육을 제대로 하면 사부(師傅)는 그 가르침을 정리하여 천자에게 바치게 됩니다. 천자가 그것을 보고 취사선택하여 정치를 행하면 나라가 편안해지고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입이란 대지에 산천이 있는 것과 같아서, 재물과 보화와 각종 도구들이 거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대지에는 기름진 들판과 좋은 농토가 있어야 의복과 먹을 것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말을 할 수가 있어야 정치의 옳고 그름과 득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됩니다. 아름답고 좋은 행동을 추진하는 정령이 확립되어야 법령으로 인한 폐단이 줄어들게 되는 재화와 의복과 음식이 생산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입술 사이를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잘 들어야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입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여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수도에는 감히 왕을 비판하는 말을 아무도 할 수가 없었다. 3년이 지난 후에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공격했다. 여왕은 지금의 산서성 곽현(霍縣)의 동북쪽에 있던 체(彘)로 도망쳤다. 1.희발[姬發]- 무왕 武王 1046 BC-1043 BC 2.희송[姬誦]- 성왕 成王 1042 BC-1021 BC 3.희쇠[姬釗]- 강왕 康王 1020 BC-996 BC 4.희하[姬瑕]- 소왕 昭王 995 BC-977 BC 5.희만[姬滿]- 목왕 穆王 976 BC-922 BC 6.희예호[姬繄扈] -공왕 共王 922 BC-900 BC 7.희간[姬囏] - 의왕 懿王 899 BC-892 BC 8.희벽방[姬辟方] - 효왕 孝王 891 BC-886 BC 9.희섭[姬燮] - 이왕 夷王 885 BC-878 BC ,暴虐無道,爲國人所殺。 도구전려왕 포학무도 위국인소살. 9번째로 주여왕에 이르니 포학함이 도가 없어서 나라사람에게 죽음을 당했다. 此乃千百年 千百年[ qiān bǎi nian ] : 수천 수백 년. 매우 긴 세월이나 긴 시간을 가리킴 民變 民變:민중 봉기 之始,又虧虧(이지러질, 덕택으로 휴; ⾌-총17획; kuī) kuī 1.손해 보다. 잃어버리다. 손실되다. 2.부족하다. 모자라다. 기울다. 周召二公同心協力,立太子靖爲王,是爲宣王 주선왕(周宣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828년에 재위 올라 기원전 782년에 죽은 주나라 왕이다. 주려왕(周厲王)의 아들로 희(姬) 성에 이름은 정(靜)이다. 주려왕의 폭정으로 주나라 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려왕은 체(彘) 땅으로 달아나고 태자였던 선왕은 소공(召公)의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국인들이 알고 달려가 태자를 죽이려고 하자 소공이 자기의 아들을 태자라고 속여 내 주었다. 소공의 아들은 국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선왕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윽고 주려왕이 망명한지 14년만에 체 땅에서 죽자 선왕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 후 주공와 소공의 보좌를 받아 문무(文武)와 성강(成康)을 본받아 대대적으로 군정을 정비했다. 증강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윤길보(尹吉甫)에게 명하여 험윤(玁狁)을 격퇴하고, 이어서 진중(秦仲)과 그의 아들 장공(莊公)을 시켜 서융을 정벌했다. 다시 남쪽의 형(荊), 초(楚) 및 회이(淮夷)에 대해도 여러 차례 정벌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렸다. 역사상 이를 선왕중흥(宣王中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말년에 이르자 태원의 견융(犬戎), 조융(條戎), 분융(奔戎) 등과 벌린 싸움에서 모두 패하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특히 선왕 37년 기원전 789년 강융(姜戎)과 천무에서 싸워 대패함으로 해서 주나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한 대신들의 충간을 무시하고 태원을 백성들을 징발해서 천무에서의 손실을 보충하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의 권력을 강화했다고 했으나 말년에 실정을 거듭함으로 해서 위기를 자초했다고 할 수 있다. 。 차내천백년민변지시 우휴주소공이공 동심협력 입태자정위왕 시위선왕. 이로부터 천백년의 백성의 변란이 시작되니 또한 주공, 소공의 2공이 같은 마음으로 협력한 덕분에 태자인 정을 세워 왕을 삼으니 이가 주나라 선왕이다. 那一朝天子,卻又英明有道,任用賢臣方叔논어: 鼓方叔入於河(鼓는 擊鼓者라 方叔은 名이라 河는 河內라) 、召虎 주선왕(周宣王) 때, 회이(淮夷)를 토벌한 소호(召虎) 其詩曰: [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抗四方, 徹我土疆.] 、尹吉甫 주선왕(周宣王 : 재위 기원전 827-782년) 때 사람으로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獫狁)이 주나라를 침략해 오자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태원(太原)까지 쫓아 버렸다. 윤길보는 그 뒤를 추격하여 삭방(朔方 : 지금의 내몽고 항금기(杭錦旗) 부근)에 성을 쌓고 한 사람의 병졸도 잃지 않고 개선하였다. 、申伯 신백【申伯】신백은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재상인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은 사악이 신령을 내리어 보후와 신백을 내었도다 、仲山甫 《시경(詩經)》「대아편(大雅篇)」의 「승민(丞民)」에 있는 「기명차철 이보기신(旣明且哲 以保其身)」에서 나온 것이다. 시는 주대(周代)의 현명한 재상 중산보(仲山甫)를 찬양한 것으로서 중산보(仲山甫)는 마음을 근엄, 공손하게 가지고, 나랏일을 항상 정사선악(正邪善惡)을 똑똑히 가려서 공정하게 처리했으며 또 천자를 충성으로 보필함으로써 명철보신(明哲保身)하였다고 한다. 옛날부터 널리 사리에 통하여 사물을 깊이 관찰, 판단하고 그 지혜로서 거취를 그르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의 처세술을 찬양할 때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시경》승민편(丞民篇)에는, 주(周)나라 때의 명재상 중산보(仲山甫)가 선왕(宣王)의 명을 받고 제(齊)나라로 성을 쌓으러 갈 때 길보(吉甫)라는 신하가 그의 덕을 찬양한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肅肅王命 仲山甫將之(숙숙왕명 중산보장지) ;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그대로 행하고 邦國若否 仲山甫明之(방국약부 중산보명지) : 이 나라가 잘되고 못 됨을 중산보가 밝히네. 旣明且哲 以保其身(기명차철 이보기신) ; 밝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여 자기 몸을 보전하며 夙夜匪解 以事一人(숙야비해 이사일인) ; 아침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임금님만을 섬기네. 等,復修文、武、成、康之政,周室赫然 혁연: 1. 벌컥 성내는 모양. 2. 놀라 움직이게 하는 모양. 3. 빛나서 성한 모양 中興 중흥:국운이나 가문(家門) 따위)쇠퇴(衰退)한 것이 중간(中間)에서 다시 일어남 다시 일어남(일으킴) 。 나일조천자 각우영명유도 임용현신방숙 소호 윤길보 신백 중산보등 부수문 무 성 강지정 주실혁연중흥. 주선왕은 이에 천자로 조회되니 또한 영명하고 도가 있어서 현명한 신하인 방숙, 소호, 윤길보, 신백, 중산보등을 부르고 다시 문왕, 무왕, 성왕, 강왕의 정치를 닦으니 성대한 주나라 황실이 중흥되었다.
<백사전> 『백사전(白蛇傳)』은 송대(宋代)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뇌봉탑(雷峰塔)에 관한 백사 전설을 수록한 책이다.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은 예로부터 인구에 널리 회자되어 전기(傳奇)적 색채가 농후한 신화전설을 수없이 낳았다. 이처럼 백사전의 무대는 항주 서호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결말을 맺는다. 뇌봉탑(雷峰塔), 보탑(保塔) 등 서호의 명승고적을 배경삼아 극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것이다. 백사전의 주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서호의 한 청년인 허선(許宣)은 배를 타고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묘령의 여인 백삼반(白三班)을 배에 태워준 것이 인연되어 서로 진심어린 사랑을 이어간다. 하지만 백 낭자는 흰 뱀이 변신한 여자. 허선은 뒤늦게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금산사(金山寺)로 찾아가 법해선사(法海禪師)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후 법해의 법력으로 백 낭자는 뇌봉탑(雷峰塔) 아래에 갇히고, 허선은 남녀 간 애정의 허상을 느끼고 출가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1987년 장국영과 왕조현이 주연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천녀유혼』의 모태 설화이기도 하다. 설화와 영화는 스토리가 약간 다르지만, 요괴로 태어나 정인에 대한 헌신과 과감한 애정이 소설 곳곳에 녹아있는 점은 비슷한 구도를 지닌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기존의 관념을 깨고 정인에 대한 여인의 진취적인 애정공략을 그려낸다. 백 낭자는 허선과 백년해로하기 위해 먼저 상대에게 혼인을 청하는 등 모든 면에서 남성보다 더 적극적인 성격을 보인다. 이는 기존 관습에 대한 백 낭자의 반항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봉건 매매혼인에 반대하는 청춘남녀의 갈망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비록 높은 수완과 의지를 지녔으나 세상의 방해로 오매불망 원하던 행복을 이어가지 못한다. 정인과의 자유로운 사랑이 끝내 시련으로 끝나고 마는 비극의 여인인 것이다. 애정과 관련 또 다른 특이점은 요괴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인의 질투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녀가 허선에게 보이는 연정은 인간의 사랑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대하고 숭고한 사랑이라기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정의 굴곡이 인간과 백 낭자 사이에서 굽이굽이 엮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요괴인 백 낭자가 보여주는 헌신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정을 빗대 인간 사랑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또한 백사전은 불교적 색채를 띠는 작품이다. 포교를 위해 민간 토템신앙으로 익숙한 ‘인간과 뱀의 결합’이라는 원형에다 뱀의 정령을 물리치는 법해선사를 등장시켜 종래의 설화들과는 차별성을 보였다. 소설의 결말에서 법해는 시를 한 수 지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색을 멀리하길 권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불교의 사상을 대변한다. 한편 백사전은 영화와 경극 등 다양한 매체로 공연된 바 있다. 특히 2007년 9월에 중국국립경극단이 경극 ‘백사전’을 서울해오름극장에서 열연해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화려한 경극의상과 실감나는 무대를 통해 관객들의 눈길은 물론 감정까지 한꺼번에 사로잡은 것이다. 이런 인기를 반증하듯 백사전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영화로도 여러 번 다루어졌다. 또한 2011년에는 홍콩 유명배우 이연걸이 직접 출연해 관록 넘치는 열연을 보였으며, 현대성과 로맨스의 애틋함이 더욱 짙어진 작품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이 책의 번역은 ‘『백사전』(지은이 풍몽룡), 21세기출판사(2009년 2월)’ 출판본을 기본으로 삼고 다른 출판사의 판본을 비교해 일부 가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동주열국지 1> <동주 열국지>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1964년에 김구용의 <열국지>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만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동주 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다. 수백 개의 제후국이 명멸하고, 수많은 사상가가 온갖 꽃을 피웠으며,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이 역사의 무대를 수놓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관포지교, 오월동주, 대의멸친, 화씨지벽, 순망치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자취, 즉 인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주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어왔음도 사실이다. 기실 <동주 열국지>는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무척 장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도 매우 방대하여 소설의 일관된 흐름이나 플롯이 <삼국지>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동주 열국지>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동주 열국지>의 마지막 정리자인 채원방은 ´열국지독법´에서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全要把作正史看, 莫作小說一例看了)"고 했다. 이것이 글항아리가 <동주 열국지>를 소설이 아니라 인문 고전으로 분류한 이유다. 반세기 만의 새로운 번역 고전번역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역작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동주 열국지 사전』 제작 기존 번역은 물론 원전의 오류까지 잡아낸 정본 1) 『동주열국지 사전』을 별도의 단행본으로 편집하여 독서의 편의를 제공했다. 2) 중국문학 전공자의 장점을 살려 『동주열국지』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백화체白話體 문장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힘썼다. 3) 각주를 통해 가급적 『동주열국지』 자체의 오류를 밝히고자 했다. 4) 통상적인 한자 발음과 달리 읽히는 인명과 지명의 근거를 각주로 밝혔다. 5) 기존 번역본의 장회 나누기가 원본과 다른 경우 모두 원본의 체제로 되돌렸다. 6) 원본의 장회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장회의 제목도 모두 번역했다. 7) 『동주열국지』에 나오는 고사성어의 뜻을 풀고 본래의 출전을 밝혔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1964년에 김구용의 『열국지』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만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동주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다. 수백 개의 제후국이 명멸하고, 수많은 사상가가 온갖 꽃을 피웠으며,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이 역사의 무대를 수놓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월동주吳越同舟, 대의멸친大義滅親, 화씨지벽和氏之璧, 순망치한脣亡齒寒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자취, 즉 인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 연의소설: 마오쩌둥이 애독했던 『열국지』 『동주열국지 애독자였던 마오쩌둥은 1961년 3월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공작회의에서 강연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동주열국지』는 기본적으로 정확합니다. 그것은 『좌전左傳』의 내용에 근거하여 개편한 저작입니다. 책을 쓴 사람은 민간 작가이며 포함된 내용에는 왕실 전복 활동이 정말 많습니다.” 마오쩌둥은 역사소설 『동주열국지』가 『좌전』 등 정사를 개편한 저작이므로 내용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며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공실公室과 왕실의 파란만장한 권력투쟁과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동주열국지』를 평생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반영하듯 1997년 성쉰창盛巽昌은 『마오쩌둥과 동주열국지毛澤東與東周列國志』(광시런민출판사)란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동주열국지』는 중국에서 『삼국지연의』의 뒤를 잇는 역사 연의소설로서 명성을 드날리며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주열국지』(이하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어왔음도 사실이다. 기실 『열국지』는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무척 장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도 매우 방대하여 소설의 일관된 흐름이나 플롯이 『삼국지』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열국지』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가 장구하고 등장인물이 방대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처럼 3할의 허구조차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춘추春秋』에 정통했던 풍몽룡馮夢龍은 여소어餘邵魚의 『열국지전列國志傳』을 개편하여 『신열국지新列國志』를 간행하면서 『춘추좌전春秋左傳』 『전국책戰國策』 『국어國語』 『여씨춘추呂氏春秋』 『사기史記』 등의 역사책에 게재된 사실史實을 소설의 본문으로 채용했다. 물론 그사이에 풍몽룡의 첨삭과 윤색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허구가 3할이라면 『열국지』의 허구는 채 1할이 되지 않는다. 『열국지』의 마지막 정리자인 채원방蔡元放도 「열국지독법列國志讀法」에서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全要把作正史看, 莫作小說一例看了”고 했다. 이것이 글항아리가 『동주 열국지』를 소설이 아니라 인문 고전으로 분류한 이유다. 우리가 『춘추좌전』이나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완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열국지』는 정사의 내용을 그대로 채록했음에도 나름의 문학적 배치와 윤색을 통해 소설로서의 읽는 재미를 배가했다. 따라서 『열국지』를 읽으면 채원방의 장담처럼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을 모두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열국지전』 언해본이 유행한 이후 1964년에 나온 김구용 번역본이 거의 유일한 완역본으로 『열국지』 독서 시장을 점유해왔다. 따라서 이번 새 번역본에서는 우선 원본 체제에 더 가까운 완역본을 지향하면서 기존 『열국지』 번역본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반세기 전 우리나라에서 『동주열국지』를 처음으로 완역한 김구용은 서문에서 『열국지』를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비견했다.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인문학의 원천 중 하나다. 서양에서는 나라를 막론하고 그리스 신화를 그들 학문과 사유의 중요한 출발점의 하나로 삼는다. 그렇다고 그리스가 그리스 신화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사대주의나 외세 의존주의로 매도되지도 않는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신화가 부족한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풍부하게 기록된 역사에 기대 인간 사회의 온갖 양태를 조감하고 해석해왔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와 사상은 그 이후 동아시아 전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가 서양 전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화제나 논리의 증거로 삼으면 자칫 중화주의나 사대주의로 매도하기도 하는 듯하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춘추전국시대나 중국 고전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며 국수주의적 발언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얼마나 편협한 태도인가? 춘추전국시대 역사는 그리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 유산일 뿐이다. 특히 오늘날 동아시아 인문학에 깊은 자취를 남긴 인간 삶의 중요한 궤적 중 하나다. 그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소설화한 작품이 바로 『동주열국지』다. 우리가 서양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을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동아시아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은 『동주열국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