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리마스터판)> “엄청난 죄책감, 희망 그리고 고통을 전달한다”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2020 최고의 책 TOP 10 선정! 우리 시대의 불행과 고통을 간파하는 직관 다시 읽어도 탁월한, ‘하성란’ 소설의 정수를 담은 단편들 *창비에서는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소설 중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불행과 고통을 간파하는 직관을 타고난 소설가 하성란의 세번째 소설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리마스터판으로 돌아왔다. “이 뛰어난 단편집은 엄청난 죄책감, 희망 그리고 고통을 전달하며 어둡고 이상하면서도 응집력 있는 이야기들이 작가의 탁월함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2020년 한국 작품으로는 두번째로 미국 『퍼블리셔스 위클리』 최고의 책 TOP 10에 선정되면서 출간 이후 18년 만에 다시금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작품집에는 프랑스 전래동화 『블루비어드』(Bluebeard, 푸른수염)를 재해석해 설화 속 비밀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표제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를 비롯해 “1999년 6월의 씨랜드 화재참사를 날카로운 사실주의적 필치와 빼어난 테크닉으로 극화한 수작”(한기욱, 해설) 「별 모양의 얼룩」, 경관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파리」, 집단 성폭행으로 인한 피해자의 죽음과 가해자들의 잔혹함을 냉소적으로 그린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하성란’ 소설의 정수를 담은 11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작가는 리마스터판을 다시금 매만지면서 “지금은 쓰기 꺼려지는 단어와 상황들로 그 시절을 돌이켜”보며 ‘시간의 힘’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안도했고 여전히 야만의 상태로 머물러 요지부동인 것들에 절망스러웠”(‘새로 쓴 작가의 말’)지만 당시 소설을 쓰던 순정하고 절실한 마음이 여전히 유효함을 되새기며 다시 이 책을 펼쳐 드는 독자들에게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한다. 초판 출간 이후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도 이 책에 담긴 소설들은 하성란 특유의 적확한 언어와 탄탄한 소설적 구성으로 여전히 탁월하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한국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적확한 언어와 탄탄한 소설적 구성 여전히 마주하게 되는 한국사회의 아픈 진실 「별 모양의 얼룩」은 유치원에서 떠난 여름캠프에서 난 화재 사고로 여섯살 딸을 잃은 ‘여자’가 겪는 상실의 시간을 그린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일주기에 모여 사고가 난 야영장으로 향하고, 그들은 근처 가게의 주인에게서 옷에 ‘별 모양의 브로치’를 단 아이가 사고 시간 가게 앞을 지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졸지에 자식을 잃은 여자의 내면심리뿐 아니라 평범한 도시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비애를 별도의 해명이나 수사 없이 효과적으로 표현한다”(한기욱, 해설)는 평을 받은 이 작품은 우리 사회가 참극을 겪을 때마다 회자되는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의 ‘나’는 턱에 푸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남자와 비행기에서 만나 삼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게 된다. 열두자짜리 오동나루 장롱을 집 안에 들여놓으며 나는 대대손손 이어지는 평범하고 다복한 결혼생활을 꿈꾸지만, 남편 제이슨은 나보다는 친구인 챙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방에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나에게 당부한다. 「파리」는 서울에서 시골로 쫓겨온 경찰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부락 사람들과 불화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답답한 시골 생활을 하던 사내는 우체국에 다니는 한 여자에게 호감을 보이고 그녀의 방에 숨어들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다른 사람으로 밝혀지고 사내는 마을 사람들의 농간에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밤의 밀렵」은 보험사 직원이 전임자의 말을 곱씹으며 숨진 박기철의 사인을 밝히는 과정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노루’라고 불리던 박기철이 살던 산속 마을은 ‘초식동물’을 닮은 사람들이 사는 집성촌으로 사냥철 장사와 송이 캐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산속을 그야말로 노루처럼 누비던 박기철의 죽음이 의아한 직원은 어느 깊은 밤 박기철이 걷던 숲길을 걷게 되고 섬뜩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일곱살 기억부터,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지방을 떠돌며 한량처럼 지내던 ‘진짜 아버지’와 보낸 유년 시절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교회에서 만난 ‘미음’과 여름성경학교에서 경쟁하고, 부친과의 외출에서 만난 ‘진이’와 노래로 대결하는 ‘총명한 딸’의 모습이 야무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나’는 약혼자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결혼을 앞둔 약혼자의 생일날 그의 십사년 지기인 세 친구를 처음으로 만난다. 자취방의 술자리가 무르익고 술에 취하면서 여자는 잠이 들고, 잠결에 그들이 나누던 학창시절의 비밀을 듣게 된다. 여자는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약혼자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소식을 들은 약혼자는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와이셔츠」는 칠개월간의 백수생활 끝에 집을 나간 남편에게서 해방감을 느끼던 은옥이 남편의 빈자리를 체감하게 되는 순간들을 담아낸다. 아파트 아이들 사이에서 ‘연 아저씨’로 불리며 연이 하늘로 날 수 있게 도와주던 남편이 부재하는 동안, 은옥은 하늘로 날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연처럼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학생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저 푸른 초원 위에」는 오랫동안 꿈꿔온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 부부가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도둑맞은 뒤,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집요하고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를 찾는 동안 정작 그들의 아이는 돌볼 수 없어 다리가 불편한 아이를 방 안에 가둬두고 다니는데, 어느날 돌아와보니 아이가 사라져 있다. 「고요한 밤」은 아파트의 층간소음 문제를 다룬다. 목수가 되고자 은행을 그만둔 남편을 대신해 생계에 대한 부담을 떠맡은 아내는 목수 일은 연마하지 않고 위층의 소음 문제에만 예민하게 구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그러다 아파트를 뛰어다니던 위층의 아이들이 다리를 다치고 급기야는 실종되면서 아내는 남편이 의심스럽게 느껴지고, 남편이 위층 남자에게 편지까지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끼손가락」에서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한밤중에 범상치 않은 택시를 타게 된다. 택시를 훔쳤다고 말하는 특이한 태도의 기사에게서 불안감을 느끼던 ‘나’는 음주운전으로 차선을 넘나드는 차를 보고 택시 기사와 갑자기 의기투합하여 쫓아가게 되고, 긴박하게 운전을 하는 중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택시 기사의 새끼손가락의 비밀이 밝혀진다. 「개망초」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강물에 버려진 고등학생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친구를 만나러 나왔다가 사고를 당한 아이는 강물 속에 잠기게 되고, 같이 낚시를 다녔지만 사고로 양손을 잃은 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시장에서 통닭집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실제 신문의 기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소설은 “소설집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이”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낡고 공허한 목소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름을 부르듯 소녀에게로 향했던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새로 쓴 작가의 말’)고 작가는 회고하며, 이번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리마스터판 작업으로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에는 재난과 사고, 죽음과 관련된 작품들이 유독 많고, 작중인물들은 그 경험들을 일상 안에서 극복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작가 하성란은 「와이셔츠」의 은옥이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돌리면서 혹시 바다에 빠진 조난자는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235면)듯이 섬세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삶의 위기에 빠진 인물들을 건져내 다독여주고 위로한다.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하는 어느 장면, 잊지 말아야 하는 어떤 감정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이 책을 다시금 소중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여름의 맛> 신체에 달라붙은 ‘모종의’ 느낌 취향이라 단정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의 세계 하성란의 다섯번째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네번째 소설집 『웨하스』(2006) 이후 7년 만에 만나는 소설집이고 신작으로도 장편소설 『A』(2010) 이후 3년 만이다. 최근 2013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하는 반가운 만남이다. 소설집에는 「두 여자 이야기」 「여름의 맛」 「알파의 시간」(현대문학상), 「그 여름의 수사(修辭)」(오영수문학상)와 더불어 「카레 온 더 보더」(황순원문학상)까지 한여름을 추억하며 읽기 좋은 10편의 작품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책에 담긴 하성란의 단편소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다 읽어내지 못한 숨겨진 의도와 이야기를 찾게 한다. 그러한 감각을 부르는 읽기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다각적으로 만나게 한다. 또 예민한 감각을 사용하게 해 긴장감을 높이는 가운데 어떤 정확한 말, 고급한 말보다 더 ‘느낌 있는’ 단어의 선택과 특유의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는데, 이것은 하성란 작가만의 여유가 전하는 선물이다. 초가을에 떠올리는 ‘여름의 맛’은 어떤 것일까. 푹푹 찌고, 울긋불긋 달아오르고, 끈적끈적 들러붙던 그날의 일들이 조금은 서늘하고 쓸쓸한 뒷맛을 전하지는 않을까. 독자들이 살아낸 여름과 맞이할 여름 속에서 함께할 『여름의 맛』과의 공감을 기대한다.
<크리스마스캐럴>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열여덟 번째 책 출간! ■ 이 책에 대하여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 소설선, 하성란의 『크리스마스캐럴』이 출간되었다. 2018년 『현대문학』 1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이번 작품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한자리에 모인 세 자매의 가족들이 듣게 되는 막내의 기이한 체험이 채색된 소설이다. 우리를, 언제라도 좋을 시간에 단번에 크리스마스 전야의 식탁으로 불러 모을, 6년 만에 발표되는 하성란의 반가운 신작이다. 제목과 첫 문장에서부터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과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크리스마스 전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유령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소설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 액자 구성의 연쇄적이고 반복적인 서사 등이 앞 두 작품과 몹시 흡사한 이 소설은 ‘나’의 막냇동생의 이야기를 파편적인 기록으로 옮긴 후, 그날 밤을 반추하는 ‘나’의 기억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소설 속 ‘나’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한 잡지사의 기자로부터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짤막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받는다.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라면 뻔한 이야기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는 모처럼 가족이 다 모인 크리스마스 전야, 막내가 갑작스레 꺼낸 이야기를 소설 모티프로 삼으려 경청한다. 그러나 막상 막내가 전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던 막내 제부가 인수 예정이던 낯선 리조트에서 홀로 열흘을 머물게 된 막내. 모두가 믿지 않던, 허허벌판일 거라 짐작했던 그 산골에 정말 리조트가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처음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막내의 눈에 어둠 속에서 희끗하게 빛나던 건 버섯처럼 생긴 리조트의 지붕이었다가 나중에는 누군가의 무덤이 되었다. 커튼 없는 방, 창 밖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나방이었으나 어느 순간 작은 여자애로 바뀌고, 다시 나방에서 여자애로 거듭 바뀐다. 막내의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이런 서술의 번복은 우리를 미궁으로 빠져들게 한다. 리조트로 안내한 사람부터 직원들까지 모두 유령에 가까운 존재들의 이야기들 가운데, 화자인 막내가 ‘10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상천외한 유령 이야기. 소설 속 막내가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믿지 못할 화자가 들려주는 유령들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끝났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 막내는 리조트에서 잃어버린 손목시계가 있던 자리를 매만진다. 시계는 막내의 짧은 결혼생활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시계를 잃어버렸던 리조트에서의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막내의 오른손이 왼손을 잠시 감았다 놓는다. 가볍게 돌아가는 나사의 회전처럼. 어쩌면 막내의 습관과 같은 이 행위는 견뎌야 했던 어떤 시간들을 기억하며, 견뎌야 하는 지금의 삶에 나사를 조이는 것일지도 모른다.”(소유정)
<삿뽀로 여인숙> 하성란은 인간의 감정적 내면을 표현하기보다는 냉정하고 정밀한 묘사를 통해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그려 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사회, 혹은 관계로부터 소외된 각각의 개인들로서 고립되고 삭막한 삶 속에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맴돌도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연민과 따뜻함을 담고 있다.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은 상실과 단절에 맞부딪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삿뽀로 여인숙]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나'라는 인물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것은 하성란에게 있어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드문 일이다. 하지만 보통의 1인칭 소설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삿뽀로 여인숙]에서의 '나'가 누구의 모습도 닮지 않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일 수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삿뽀로 여인숙]에 관한 몇 가지 [삿뽀로 여인숙]은 주인공인 진명(나)이 쌍둥이 남동생인 선명의 죽음에서부터 발을 내딛어 삿뽀로 여인숙에 다다르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두 가지 이야기는 언뜻 아무런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하나의 현(絃)으로 이어져 있었고 진명은 그 현을 따라 긴 여행을 떠난 셈이다. 무수한 형상들의 모자이크 이 소설에는 여러 사람의 삶과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선명을 사랑하여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윤미래와 일본 남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김유미, 카페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내,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진명에게 손을 내미는 김정인. 특히 김정인은 삿뽀로에서 태어나 그 곳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내이다. 이들 모두의 삶은 낱개의 조각그림처럼 흩어진 채로 진명을 스쳐 지나간다. 무수한 형상을 이루는 조각그림은 결국 하나의 모자이크가 되듯, 진명은 그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남루하고 황량한 시간 속을 버겁게 지나오는 동안 이미 삿뽀로 여인숙으로 안내되고 있는 것이다.
<포의교집> ≪포의교집≫은 적어도 1866년 이후에 창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문 소설이다. 작자는 미상이다. 규장각에 소장된 1책 필사본으로 유일본(古3477−8)이다. 책 크기는 32×20센티미터이며, 전체 84면이다. 매 면 10행이고 매 행 20자의 해서체로 필사돼 있다. 이 작품은 남녀 주인공의 결연 방식, 지기(知己)의 추구, 시사(詩詞)의 삽입 등에서 전기 소설의 창작 기법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전기 소설에서 벗어나 있다. 남주인공이 재자(才子)가 아니고 용모와 재주가 모두 보잘것없으며, 신분과 나이가 현격하게 차이 나는 기혼 남녀의 사랑을 담고 있으며, 지기를 욕망하는 주체가 남성이 아니라 하층 계층인 여성이며, 그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오해와 착각으로 어그러진다. 시공간도 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시간적 배경은 동치(同治) 갑자(甲子)인 1864년부터 병인(丙寅)인 1866년까지인데, 1866년(고종 3) 음력 3월에 운현궁에서 거행됐던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처럼 ≪포의교집≫의 사건이 당시 역사적인 사건의 시간과 일치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한양으로 설정하고 있다. 남녀 주인공이 만난 곳이며 작품의 주요 배경지가 된 곳인 중구 을지로 2·3가, 수표동, 장교동, 저동 2가에 걸쳐 있던 대전골[竹洞], 민궁이 있었던 안동, 초동, 도선암, 북한산의 승가사, 경모궁 등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제시됐다. 또한 ‘기혼’ 남녀의 연애담을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생은 고향에 젊은 부인이 있는 유부남이고 양파도 유부녀다. 이 둘은 양파의 남편과 시아버지가 함께 기거하고 있는 집에서 만나고 사랑을 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알 정도로 감추지 않는 사랑을 한다. 양파는 이생과의 만남을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들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시선도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선 시대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당파는 이생과 양파가 기혼 남녀인 것을 알고도 둘의 만남을 돕고, 이생의 주변인들은 둘의 사랑을 부러워할 뿐 비난하거나 말리지 않는다. 더구나 양파의 시아버지는 며느리인 양파가 이생과 한방에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 작가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양파가 변변찮은 이생과 사랑을 하고 지기를 만나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관심을 둘 뿐 양파의 행위를 비난하는 논조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