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 하품> 문학상 최초 그랜드슬램, 한무숙문학상 ․ 동인문학상 ․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정영문의 중편소설 “뭘 하고 있나.” “내 인생을, 응시하고 있는 걸세.” “못 하는 말이 없군.” 무의미한 말과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향연, 고독의 고백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5편을 골라 특별판으로 출간하였다. <소설향 특별판>으로 출간된『하품』은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문학상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으로 큰 화제를 모은 정영문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삶 그 자체에 대한 절망과 회의에서 솟아나는 권태를 삶의 일상성을 모욕하는 듯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마치 농담을 하듯 유희적으로 그려 보여준다. ‘나’와 ‘그’는 함께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서로 하찮게 여기지만, 각자 삶과 세계에 지루함과 비루함을 느끼면서 일련의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무료하고 심심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억지로 쓸데없는 행동들을 일삼곤 한다. 그들의 일탈은 그저 반쯤 썩은 사과를 깎아서 먹는다든지, 코끼리한테 주려던 눅눅해진 강냉이를 먹는다든지, 코털이나 머리털을 뽑는다든지 하는 일들에 불과하다. 작가는 무의식과 비정형을 끝없는 중얼거림이라는 새로운 화법으로 얘기하며 독자를 이전의 한국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또한 언어가 현실과 얼마나 무관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극단적으로 분절된 대화의 연쇄를 통해 표현하면서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결국 우리가 발 디딘 공간이 소설 속 농담과 하품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꿈>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견디는 농담의 미학, 관조의 철학 마침내 정영문이라는 문학 불안과 권태, 그리고 유머라는 세 가지 질료로 낯설고 견고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 온 소설가 정영문의 소설집 『꿈』이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로 재출간되었다. 『꿈』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2003년에 출간되었던 소설집으로, 1996년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발표한 이래 26년간 꾸준히 이어져 온 정영문 세계관의 초기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디딤돌 같은 책이다. 정영문의 문학은 가장 근본적인 곳으로부터 출발한다. 생이라는 출발점, 죽음이라는 종착지, 그 사이를 메우는 숱한 시간들을 말할 때 정영문은 각각 권태와 불안, 유머라는 재료를 택했다. 원한 적이 없지만 이미 시작되어 지난하게 계속되는 생은 권태롭고, 모든 생의 종착지는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불안이 촉발된다. 그리고 권태와 불안 위에 세워진 기나긴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유일한 물약이 있다면, 바로 유머다. 정영문의 문장은 생의 본질을 닮아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중얼거리며 권태롭게 이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휩싸여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불안한 의문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우리를 무조건적인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힘 빠진 웃음이 있다. 정영문의 소설이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함으로써 이 우스꽝스러운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강보원 평론가의 말은, 정영문이 꿰뚫고 있는 삶의 본질과 그 덧없음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식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꿈』을 통해 그의 고유한 문학이 시작되던 초기의 고민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이 책이 각자의 삶의 무게와 질서를 일순간 무너트리거나 뒤바꿀 운명의 열쇠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달에 홀린 광대> 1996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창작과 번역 작업을 유연하게 오가며 우리에게 낯설고 매력적인 독서 체험을 선사한 작가 정영문의 세번째 장편소설 『달에 홀린 광대』(2004)를 한국문학전집 제30권으로 선보인다. 정영문의 시그니처인 만연체 문장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화자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가 알맞게 어우러져 “그의 소설세계에서 전환점에 해당”(문학평론가 손정수)되는 소설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달에 홀린 광대」 「산책」 「숲에서 길을 잃다」 「양떼 목장」 「배추벌레」 「횡설수설」 등 여섯 편의 이야기를 느슨하게 연결하면서도 각각이 독립된 별개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공통의 연결점을 마련하여 기존의 장편소설 문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 모델을 제시한다. 이 여섯 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불안과 권태와 냉소와 유머로써 삶을 바라보는 정영문 소설의 독특한 시각이다. 『달에 홀린 광대』는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지 않고 끊임없이 샛길로 빠져드는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천천히 에둘러 가는 산책의 시간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풍경을 매력적으로 담아낸다.
<오리무중에 이르다> “이 세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정영문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더이상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세상의 끝, 무엇에 대해서도 할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말하기의 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쓰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의 끝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정영문 소설 속 인물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낯선 타국에 가거나 사나운 개에게 물리는 상황이 펼쳐졌을 때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어떤 것들이 정영문 소설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극적인 사건과 맞닥뜨리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서술하는 인물의 정교한 중얼거림이다. 이처럼 그가 단순히 한두 문장이 아닌, 작품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연체 문장을 통해 인물의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정영문이 생각하는 ‘진부함’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수백 가지 정도의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을 지나치게 거듭해서 사용한 것 같았고, 때로는 아주 단순한 동작, 가령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 너무도 진부하게 여겨져, 거의 동작의 화석처럼 여겨져 그 단순한 동작조차도 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어쩌다 내뱉는 탄식이 탄식의 부스러기를 내뱉는 것 같은 때도 있었다. (…)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에는 잠이라는 너무도 반복된 진부한 행위에 대한 거부도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 같았다. _「개의 귀」 중에서 다시 말해, 어떤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되는 표현들이란 이미 그 자체로 너무나 진부한 나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의 작업 중 하나가 진부함의 더께를 벗겨내는 것이라 할 때,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이 진부함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정영문에게 있어 ‘생각’은, 수백 가지 정도로 한정되는 감정과 행위와 동작 들에 비해 좀더 복잡함과 풍부함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려는 것은, 진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 ‘생각’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 소설에 작가 개인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정영문의 이번 소설집에서 그 연관성은 한층 두드러진다. 자신의 낭독회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를 바랄 때(「개의 귀」), 자살로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한 작가들의 작품만을 번역하겠다고 말할 때(「유형지 ×에서」), 우리는 소설 속 화자와 작가 정영문을 겹쳐놓으며,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이야기의 자장 안에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리무중에 이르다』를 읽으며 우리는, “마치 영영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처럼, 중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미로 안에서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그러나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어지럽고 매혹적인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
<목신의 어떤 오후> 이 책은 [목신의 어떤 오후]를 비롯하여 7편의 단편과 3편의 연작소설을 수록하고 있다. 저자의 특징이 잘 드러난 소설집이다. 특유의 문체로 죽음과 구원, 존재의 퇴조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온 저자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왔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희망도 욕망도 없이 최소한의 삶만을 유지하면서도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은 얼핏 낯설어 보이지만, 그들의 낮은 중얼거림을 천천히 뒤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유머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의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더욱 반가운 이 즐거움은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의식의 한쪽 끝은 꼭 붙들고 읽을 것.
<프롤로그 에필로그> “긴말할 것 없이 이 소설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이다.”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정영문 11년 만의 장편소설 “이 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재기가 반짝이며 은은하게 미쳐 있고 시종일관 비틀린 유머를 선사한다.” _정지돈(소설가) 등단 이래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른 누구와도 비견된 적 없는 소설쓰기의 형식으로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자리를 점하고 있는 소설가 정영문의 장편소설 『프롤로그 에필로그』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장편소설로는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문학상 최초 그랜드슬램을 이루어낸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11) 이후 11년 만이다. 2022년 1월부터 7월까지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후 정교한 퇴고 작업을 거쳐 1,500매 분량으로 완성한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그의 인장과도 같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만연하게 이어지는 문장의 리듬을 어느 때보다 깊게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번 소설의 모든 문단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설가 정지돈이 발문에서 “정영문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그의 문장이 기이할 정도로 명료하다는 사실”이라고 짚어주었듯 이는 그의 소설이 얼마나 정확하고 단단한 문장 위에 세워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무의미를 탐구하는 시선은 한층 가뿐해졌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미국의 시애틀과 텍사스, 캘리포니아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를 넘나들며 보고 듣고 생각하고 상상한 것들을 한데 쌓아올린 이 대장정의 시작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긴말할 것도 없이 이 소설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본문 중에서)라고. 곧 소설 속에 등장할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 틈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아내지 못하도록 막아서듯. 수없이 나뉘며 끝없이 흐르는 물처럼 무한히 이어지며 계속해서 옆으로 새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이러한 서문에도 불구하고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읽는 우리는 자꾸만 의미 찾기, 나아가 서사 찾기의 길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동시대의 거의 모든 나라의 거의 모든 소설가들과 사람들이 서사가 있는 소설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본문 중에서)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를 하나의 분명한 선으로 이어 플롯을 찾아내려 하는 것. 이러한 관습적인 독해 방식 탓에 우리는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스터리 앞에서 더더욱 서사 찾기에 몰두하게 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미국인 친구와 함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온 소설가 ‘나’는 권태로운 나날을 이어가던 중 해변으로 떠밀려온 발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 이야기인즉 2007년부터 지금까지 브리티시컬럼비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주인 없는 발 열네 쌍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매혹된 ‘나’는 추가로 떠밀려올 수도 있는 발을 찾으러 다니는 동시에 이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처럼 흥미로운 소재를 꺼내놓고도 정영문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그 이야기가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은 사람의 발을 찾는 것에 관한 소설은 아니었다.(본문 중에서) 이는 정영문에게 있어 소설쓰기란 “생각 속에서나마 약간의 정신적 자유를 수행하는 것” 또는 “말과 생각을 갖고 노는 일종의 놀이”(본문 중에서)일 따름이며, 서사와 플롯은 이러한 정신적 자유와 놀이를 방해하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서사와 의미에 열중하는 대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놓는다. 해변을 거닐며 물가로 떠밀려온 발에 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가 싶다가도 돌연 수달과 딱따구리의 생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아브라함이 얽혀 있는 젤라토의 기원과 노스트라다무스가 만든 잼에 관한 야사(野史), 아이스크림들의 무덤과 티라미수의 진화, 호박 숭배 등의 기상천외한 이야깃거리를 거쳐 실비아 플라스와 알바레즈, 마크 로스코와 구사마 야요이, 장국영의 작품과 생애에 관해 진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과 지식과 상상 사이를 오가며 어디에서 어떻게 끝맺을지 알 수 없게 나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정영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삶에는 핵심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