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들의 시대를 초월한 다시 쓰기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겨울 이야기』 -> 『시간의 틈』 by 지넷 윈터슨 : 뉴보헤미아. 미국. 슈퍼문이 내려오고 폭풍이 도시를 뒤흔든 그날 밤, 한 흑인 남자가 베이비박스에서 백인 아기를 발견한다. 그는 별처럼 가벼운 아기를 꺼내어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런던. 영국. 세계 금융 위기 후의 도시를 살아가는 리오 카이저는 돈을 버는 법은 알지만, 가장 친한 친구와 아내를 향한 질투를 다스리는 법은 알지 못한다. 태어난 아이는 그의 자식인가? 17년 후. 소년과 소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른다. 2016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 그의 희곡들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첫 번째 주자는 휫브레드상 수상작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Oranges Are Not the Only Fruit』(1985)로 잘 알려진 지넷 윈터슨이다. 그녀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겨울 이야기The Winter’s Tale』(1610년 집필 완성, 1611년 초연)를 선택했는데, 이는 『겨울 이야기』가 동시대 작가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Pandosto: The Triumph of Time』(1588)를 다시 쓴 이야기라는 점에서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기획 의도와 이어지며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누구나 품고 가야 할, 자신의 삶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텍스트가 있는 법이다. 나에게는 『겨울 이야기』가 그렇고, 오랜 세월 매번 다른 모습으로 『겨울 이야기』를 써 온 셈이다”라고 술회하는 윈터슨에게 바로 그 『겨울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시 쓴 『시간의 틈The Gap of Time』(2015)은 작가 개인으로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희곡 『겨울 이야기』는 오해와 질투, 분노, 파멸 끝에 긴 공백, 즉 시간의 틈을 사이에 두고 등장인물들이 용서와 화해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시칠리아에 머물고 있는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와 자신의 아내 헤르미오네의 관계를 의심한다. 그는 질투에 눈멀어 죽마고우인 폴릭세네스를 독살하려 하고, 폴릭세네스가 달아나자 왕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는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갓 태어난 공주 페르디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시칠리아 밖으로 추방한다. 소동의 와중에 시칠리아의 왕자 마밀리우스의 죽음이 전해지고 왕비는 충격에 쓰러져 죽고 만다. 한편 버려진 아기는 보헤미아의 해안에서 가난한 목동과 그의 멍청한 시골뜨기 아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의 손에 키워진다. 16년 후 아기는 아름답게 자라나 정체를 감춘 보헤미아의 왕자 플로리젤과 사랑에 빠진다. 폴릭세네스가 나타나 이들 어린 연인을 위협하고, 일련의 특별한 사건을 통해 아버지 레온테스와 딸 페르디타, 그리고 결국에는 죽었던 어머니 헤르미오네까지 다시 만나게 된다. 『겨울 이야기』에는 희곡에서는 흔치 않게 16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등장하며, 어둡고 비통한 격정과 목가적인 희극이 공존한다. 윈터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현대 무대의 소설로 옮기면서 원작의 서사와 의미에 충실하되 살을 덧붙여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빚어냈다. 『시간의 틈』은 현대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 뉴올리언스가 연상되는 가상의 도시 뉴보헤미아를 무대로 전개되는데, 이미지[像]들은 『겨울 이야기』와 쌍둥이 혹은 거울처럼 존재한다. ‘하나-막간-둘-막간-셋’이라는 구성으로 복잡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틈』에서 각 장의 제목은 모두 『겨울 이야기』에서 따온 구절이며, 윈터슨은 원작의 플롯에서부터 등장인물들의 이름 각색까지 구석구석 셰익스피어적인 디테일을 세심하게 되살렸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Leontes는 돈과 지위를 이용하여 세계를 자신이 가는 길에 굴복시키려고 하는 오만한 헤지펀드 매니저 리오 카이저Leo Kaiser가 된다. 물론 이 헤지펀드 회사의 이름은 시칠리아이다. 헤르미오네Hermione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행복했으며 만삭’인 샹송 가수 미미(허마이어니 들라네Hermione Delannet)로 변신한다.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Polixenes는 돈키호테형 보헤미안인 컴퓨터 게임 개발자 지노Xeno이며, 양성애자라는 그의 성적 취향은 그들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는 데 있어 보다 강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요컨대 원작에서는 단순히 죽마고우로 표현되었던 리오와 지노가 개작에서는 학창 시절에 동성애 관계였다는 설정을 추가함으로써 돌연한 레온테스/리오의 질투가 힘을 얻는 식이다. 원작에서 왕비의 무고를 주장하며 끝까지 왕에게 반발했던 파울리나Paulina는 리오의 동료이자 유능하며 정 많은 유대인 폴린Pauline으로, 파울리나의 남편이자 추방된 공주와 동행한 신하 안티고누스Antigonus는 리오의 딸을 지노에게 데려다주는 정원사 안토니 곤살레스Anthony Gonzales(토니)가 된다. 폴린과 토니는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목동Shepherd과 시골뜨기Clown(셰익스피어 시대에 clown은 ‘광대’가 아니라 ‘시골뜨기’라는 의미이다)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오순절교회 신도 솁Shep과 쾌활한 아들 클로Clo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흑인이다. 『겨울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로 이끄는 뜻밖의 매개자인 사기꾼 아우톨리쿠스Autolycus는 이제 오톨리커스로Autolycus, 의심스러운 유명 인사의 뒷이야기를 떠벌리며 중고차를 판매하고 있다. 페르디타Perdita/퍼디타Perdita, 플로리젤Florizel/젤Zel, 카밀로Camillo/캐머런Cameron, 마밀리우스Mamilius/마일로Milo 등 원작과 개작의 등장인물들을 비교하는 읽기는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처럼 배경과 등장인물들은 현대적이지만 소설은 그 자체로 희곡과 플롯 대 플롯으로 연관된다. 지노는 리오가 질투에 미쳐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달아난다. 리오는 미미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매도한다. 폴린은 그들 세 사람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애쓴다. 미미는 딸 퍼디타를 출산하지만 리오는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토니를 시켜 딸을 지노에게 데려다주게 한다. 그리고 토니가 강도에게 쫓기다 퍼디타를 베이비박스에 넣고 폭력적으로 살해당하는 장면이나 솁과 클로가 버려진 퍼디타를 발견하는 장면 등 더욱 박진감 있고 극적인 전개가 펼쳐진다. 윈터슨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지문地文 안티고누스가 ‘곰에게 쫓겨 퇴장’을 놓치지 않는데, 『시간의 틈』에서 토니는 베어 브리지Bear Bridge 밑에서 죽음을 맞는다. 윈터슨은 부모 세대가 아닌 자식 세대 쪽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옮기는데 이는 『겨울 이야기』가 ‘용서와 가능한 미래의 세계들에 대한 희곡이며, 용서와 미래가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희곡’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틈』은 무엇보다도 부모를 잃고 업둥이로 자란 퍼디타가 잃어버린 과거와 가족을 되찾는 이야기이다. 어른들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는 18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잃어버린 작은 아이’ 퍼디타를 되찾으면서 해결된다. 잃어버린 아이가 똑똑하고 당당한 소녀로 자라는 이 긴 시간 동안 리오와 지노, 미미는 과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지만 퍼디타가 등장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 미래는 제자리를 찾는다. 『겨울 이야기』에서 시간은 모든 시도를 한다. 레온테스는 헤르미오네가 가진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고 의심하지만 시간은 그가 틀렸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16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원작에서는 시간이 직접 등장하여 시간의 속성을 설명하고 공백에 양해를 구한다면 개작에서는 지노가 만든 컴퓨터 게임 <시간의 틈>이 비슷한 역할을 한다. 리오와 지노가 과거를 곱씹듯 꾸준히 접속하는 이 게임은 멈춰진 과거, 복잡하게 얽힌 과거와 미래,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현재에 대한 은유이다. 이렇듯 윈터슨은 상실과 후회, 사랑과 슬픔, 시간의 속성이라는 『겨울 이야기』의 주제를 때로는 저속하고 때로는 시적인 언어로 깔끔하게 담아낸다. 그녀의 첫 소설에서부터 돋보였던 경구처럼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과 절대 넘치지 않는 영리한 유머는 400년 전에 쓰인 셰익스피어 희곡 다시 읽기에 더없이 어울린다. 한편, 지넷 윈터슨은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 대해 속편을 쓸 것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속편은 작가에게 아이디어가 없을 때나 쓰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떨어지면 나는 쓰기를 그만둘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속편보다는 ‘개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덮는다는 의미에서, 다시 쓴다는 의미에서 ‘개작cover story’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틈』은 『겨울 이야기』의 개작이다. 내가 개작을 쓴 것은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면 내가 살아갈 수 없는, 글로 쓴 세상(말)wor(l)d의 일부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없다면’이라는 것은, ‘결핍’이라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의 바깥에서 산다’는 예전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그것의 바깥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라고 고쳐 써야 한다. 이것은 업둥이에 대한 희곡이다. 그리고 나는 업둥이다. 이것은 용서와 가능한 미래의 세계들에 대한 희곡이며, 용서와 미래가 양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희곡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다. _ 394~395쪽, 「음악이여 그녀를 깨워라」 지넷 윈터슨이 다시 쓴 『겨울 이야기』 - 『시간의 틈』은 원전의 울림을 고스란히 전하면서도 시간 자체가 플레이어인 컴퓨터 게임에 빗대어 현대적 서사를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마음의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이자, 복수와 용서의 이야기이고, 이들 세계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이야기이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하느님,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성정체성을 깨닫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아름답고 당돌한 이야기, 그리고 현대 영국에 재현된 구약성서 ― 억압적이고 보수적으로 변질되어 버린 기독교 문화에 대한 반발 21세기 버지니아 울프, 지넷 윈터슨의 자전 소설 휘트브레드 상 수상작 젊은 고전, 즐거운 고전, 미래를 향하는 고전을 모토로 민음사가 새롭게 선보이는 문학 전집, 민음사 모던클래식의 열 번째 작품으로, 돌발적이고 거침없는 지성이자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인 지넷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가 출간되었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이자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이 작품은 지넷 윈터슨이 양부모 아래에서 기도와 선교를 강요받으며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열여섯 살에 한 소녀를 사랑했던 경험 등을 다룬 자전 소설이기도 하다. 지넷 윈터슨은 이 작품에서 입양, 동성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적인 교회에 대한 부정, 편협한 지역 사회의 폐단 등 민감한 사회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며,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에게 수여되는 휘트브레드 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인간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현대 영국 최고의 여성 작가로 떠올랐다. 하느님,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나요? ― 성정체성을 깨닫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아름답고 당돌한 이야기 지넷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에 대한 부러움과 일종의 도전으로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고 지넷을 데려온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편집증일 정도로 기도와 선교에 집착하는 그녀는 지넷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일상을 강요한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어머니의 기독교식 교육을 받으며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한 지넷은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평범하게 지낼 수 없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지넷은 우연히 멜라니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멜라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점차 깊어지는 것을 느낀 지넷은 어느 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마을 전체에 소문이 나고, 마을 사람들은 지넷과 멜라니가 악마에 홀렸다며 손가락질한다. 그 후 지넷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교회 생활에 대한 신념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지넷 윈터슨은 ‘동성애’라는 민감하고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아직 세상의 통념에 물들지 않은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그 세계는 작가의 섬세한 글쓰기 속에서 우리가 함부로 정상-비정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영역이 된다. 무엇보다도,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게 느껴지는 이 소녀의 목소리는 그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게 다가온다. “나는 멜라니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그릇된 정욕’인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애틋한 감정이 그릇된 정욕일 수는 없다.” “난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너를 사랑해.” 나는 웃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멜라니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난 모르겠어.” 지넷은 자신의 사랑이 주님에 대한 사랑과 다름없다고 느끼지만, 이미 신에 대한 믿음, 신앙 그 자체보다는 이기적 집단 문화로 변질해 버린 폐쇄적인 교회 사회에서는 이 아이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세기 영국, 구약성서 비틀기 ― 억압적이고 보수적으로 변질되어 버린 기독교 문화에 대한 반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모두 여덟 부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각 부는 성경, 그중에서도 구약성서의 형식을 따른다.(1부 창세기/2부 출애굽기/3부 레위기/4부 민수기/5부 신명기/6부 여호수아서/7부 판관기/8부 룻기) 이러한 구성은, 작은 지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폐쇄적인 기독교 사회의 억압적인 한 면모를 비난하는 간접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1부 ‘창세기’에서는 주인공 지넷이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인류의 창조와 죄의 기원 등을 다룬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묘하게 맞물려, 지넷의 죄(동성애)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발생했는지를 암시한다.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탈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을 다룬 「출애굽기」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 학교에 입학하는 이야기를 다룬 ‘출애굽기’(2부)와 대비된다. 또한 이스라엘인의 종교의식, 예배, 생활 율법 등을 다루는 성경의 「레위기」는 지넷의 어머니가 편집증일 정도로 집착하는 신앙생활을 묘사하며 과연 ‘인간은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레위기’(3부)와 흡사하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길 것을 맹세하는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서’(6부)에서 멜라니에 대한 지넷의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으로 재탄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넷 윈터슨이 무조건적으로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지넷은 어머니의 손아귀와 교회 사람들의 집요한 관심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출을 하지만 결국 “친구였던” 신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지넷 윈터슨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체성을 흔들어 버리는, 신앙마저 버리게 만드는 인간의 그릇된 욕심을, 그리고 그 그릇된 욕심이 만들어 낸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1세기 버지니아 울프, 지넷 윈터슨의 대담한 소설 ― “가정의 미덕, 교회의 세력, ‘정상’으로 분류되는 이성애에 대한 도전” 이렇듯 오랜 시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성역으로 인정되어 온 ‘가정’, ‘종교’, 그리고 ‘사랑’이라는 미덕들에 겁도 없이 도전장을 내민 이 대담한 작품,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지넷 윈터슨이 스물세 살이었던 1983년 겨울에 쓰기 시작해 스물다섯 살이 되던 1985년에 출간한 첫 번째 소설이다. 이 소설로 지넷 윈터슨은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에게 수여되는 ‘휘트브레드 상’(‘코스타 북 어워드’로도 불린다.)을 받았다. 또한 이 작품은 1990년에는 작가 자신의 각색으로 BBC 방송국의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하고, 각종 방송 관련 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현재 영국에서 고등학교 교과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대학 입학 준비 과정 중 문학 과목에서 필수 작품으로 실리고 있다. 레즈비언 소설을 쓰는 레즈비언 작가냐는 질문에 지넷 윈터슨은 “나는 작가인데 우연히 레즈비언일 뿐이지 레즈비언 작가인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으며,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가 자전적 소설이냐는 질문에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성경을 패러디한 구성, 주인공 지넷의 독백 사이사이 삽입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 그리고 위닛 스톤자와 마법사에 관한 동화 등은 포스트모던 소설의 서사 기법을 통해 이 작품이 지닌 함축성과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자전 소설, 성장 소설, 여성 소설, 혹은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어느 하나의 꼬리표로 규정지을 수 없다. 지넷 윈터슨은 이 작품 속에서 민감한 사회 문제들을 거침없이 다루어 평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해 젊은 독자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별명에 걸맞는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