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환
지선환
평균평점
군주의 배신

<군주의 배신> ■ 책 소개 연이은 선조의 배신이 낳은 참담한 비극!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지선환 역사소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왜곡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승자의 기록에 묻혀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집필 의도가 너무나 소중하다. 지루해지기 쉬운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임에도 역동적인 전투나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도 섬세하게 싣고 있다. 또한 ‘보부상 서신’을 중간중간 삽입해 당대 정세를 밝히고 있는 등 다양한 장치로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임진왜란의 묻혔던 역사까지 파악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민본의 가치를 표방한 조선조 역시 민중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왕본과 민본의 사상적 투쟁사였다. 그러나 조선조의 역사에서도 민본의 가치는 체현되어 있지 않고 그 기록들은 너무나 축소·왜곡되어 전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역사를 되살려내고 그 가치와 의의를 재조명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민주권시대 민본의 가치가 전 영역에 투영되고 있는 현재의 시대정신이 우리들에게 엄준하게 요구하고 있는 바라 할 것이다. 『군주의 배신』은 이미 지나간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숭고한 한 지성에 의하여 다시 쓴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에서 피로 얼룩진 인간의 처절한 절규를 넘어 숭고한 영혼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도훈(국가원로회의 교육연수원장) ■ 본문 - ‘서문’ 조선을 건국하면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유학의 덕목을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고 백성들에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쳤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이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백성들에게 군주는 어버이와 같다고 가르치면서 믿고 따르도록 세뇌시켰다. 군주(君主)의 배신(背信).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백성들의 어버이였던 조선의 군주 선조는 도성인 한양과 백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여 백성들의 믿음을 배신했고, 분노한 백성들은 임금이 살던 궁궐을 불태웠다. 평양성으로 도망간 선조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평양성에서 백성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약속했지만, 왜군들이 임진강을 건너자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서 평양성을 빠져나갔고, 백성들은 어가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군주인 선조의 두 번째 배신이었다. 북으로 도주하여 의주에 당도한 선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조선의 땅과 백성들을 버리고 명나라로 가서 제후 행세나 하면서 살겠다고 명나라의 조정에 망명신청을 하여 백성들을 배신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배신이었다. 거듭되는 조선의 군주 선조의 배신에 이 땅의 백성들은 절망했고, 그 결과 수많은 백성들이 왜군에 가담하여 조선인을 향해서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백성들은 의병을 가장한 도적의 무리가 되어 도처에서 동족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임진왜란은 일면 배신자들의 전쟁이기도 했었다. 이렇듯 백성들에게 임금은 어버이와 같다고 가르쳤던 군주의 배신은 수많은 배신을 양산하였다. 또한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백성들에 대한 배신을 계속하였으니, 그는 가히 오천 년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배신의 아이콘임에 틀림이 없다. 군왕 선조에게 버려진 백성들. 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가? 임진왜란 당시 군주가 보호해 주지 않아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던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 누가 그들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무룡산을 여러 번 올랐다.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해바다와 무룡산 자락이 너무도 황홀하다. 이 아름다운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수백 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분들이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흘린 핏값으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우경화된 일본의 독도에 대한 야욕이 도를 넘고 있다. 우리가 자칫 방심하면 저들에게 우리 영토의 일부인 독도를 빼앗길 수도 있다. 아베정권의 움직임이 이렇게 노골적인데,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36년이라는 식민통치를 경험하고도 그들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몇몇 정신 나간 종교지도자들이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승리를 했어야 한다고 막말을 한다. 그 이유인즉 일본의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톨릭의 일종인 기리시탄(일본화된 가톨릭) 신자이고, 전투를 할 때는 항상 붉은색 바탕에 흰색의 십자가가 그려진 군기를 앞세워서 전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기리시탄에서 창조주는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리시탄은 명백히 십계명에 위배되는 변형된 이단종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톨릭의 전파가 우리보다 수백 년 앞선 일본에선 예수회 신부들의 적극적인 포교에도 불구하고 기리시탄은 늘어나지 않았고, 수백 년을 산속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은 가톨릭 신자의 수가 한국보다 훨씬 적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더 형편없는 수준이다. 한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총칼을 드는 이슬람식 정복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십자가만 앞세우면 모든 게 정의인양 떠들며, 저 간악한 왜인들의 마수에서 조국을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을 이교도의 괴수로 부르는 한심한 사람들이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필자는 소설 속에서는 왜란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임진왜란은 조일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왜국의 전쟁이 아니다. 왜국과 왜국을 지원한 포르투갈, 로마가톨릭의 예수회가 한통속이 되어서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과 명이 방어를 한 16세기 최대의 국제전쟁이다. 당시 왜국에 거주하며 중계무역상 역할까지 한 것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출신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쓴 『일본사』를 읽어보면 이 전쟁의 성격도 일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을 침략한 왜군 진영에 다수의 서양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회 소속의 세르페데스 신부가 고니시의 군영에서 수시로 왜군의 명복을 비는 미사를 드렸던 것으로 보아서 왜국이 단독으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지배층의 기록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소위 정사만을 참고로 역사서를 편찬하면 역사적 진실이 묻히고 역사가 왜곡되기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많은 부분의 기록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간양록』 등 수많은 기록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의병장들이 임진왜란에 대한 것을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필자는 울산과 경주, 창녕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많은 활약을 한 충숙공 이예의 후손 이경연이 쓴 『제월당실기』와 울산 지역 의병장 중에서 활약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되는 서인충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망조당유사』, 무룡산 자락에서 태어난 의병장 윤홍명의 『화암실기』, 경주 출신의 의병장 이눌이 쓴 『낙의재유집』을 참고자료로 사용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야사를 접하면서 임진왜란의 참담함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승자의 기록에 묻혀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알리고 싶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알게 된 인물들의 추악한 이면을 보면서, 자신의 가문에서 정승판서를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저런 조상도 단순히 벼슬을 했다는 이유로 자랑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이완용의 자손들이 자신의 조상이 대한제국에서 대신을 지냈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대신을 역임했으니 생각 없는 후손들이라면 그런 조상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선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조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알아본 후의 개인적인 평가는 조선의 역사상 최악의 임금이 바로 선조라는 것이다. 선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조가 끊임없이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사실까지도 그럴만해서 그런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런가 하면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까지도 선조의 잘못이 아니라 단순히 조정 대신들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잣대로 생각하면 오늘날 국정의 책임자인 대통령이 욕먹을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절대왕조시대에는 임금이 곧 국가이기에 백성들은 다 죽어도 나만 살면 된다는 것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통치의 대상인 백성들의 수보다 중요한 것이 왕권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다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백성의 9할을 잃더라도 왕권만 유지되면 그게 임금에게는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맹자는 그의 저서 『맹자』에서 민(民)이 위귀(爲貴)하고, 사직(社稷)이 차지(次之)하고, 군(君)이 위경(爲輕)이라고 했다. 백성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이 사직이고 임금은 맨 나중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왕도정치요, 민본정치일 것이다. 백성을 외면한 왕은 이미 왕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의 역사책은 임진왜란 당시에 요시라의 간계에 속아서 통제사 이순신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처럼 되어있지만, 첩자의 말만 믿고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전장의 최고사령관을 교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조선 조정이나 선조가 첩자의 정보를 역이용해서 막강한 수군함대를 보유하여 그들의 골치를 아프게 한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중첩자 요시라가 그의 조국인 왜(일본)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망명신청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절대왕조시대에는 군왕과 지배층이 토지의 대부분을 점유하여 그것을 무기로 백성들을 부리고 통제하였지만, 진정한 땅의 주인은 그곳에서 경작하며, 그 땅을 밟고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땅은 누가 소유권을 행사하느냐와 관계없이 그 땅을 터 잡아 살아가는 백성들의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재 신채호는 말했다.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는 조선사편수회를 이끌며 단군에서 조선왕조까지 우리 역사를 조작했던 일본의 역사학자는 1945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섬뜩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조선에서 철수하지만, 조선인들은 향후 100년 동안 우리가 만든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조작해놓은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철저한 자료 파괴와 조작으로 인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아직도 교과서 곳곳에 남아있는 식민사관을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교육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학계의 주류인 실증사학의 양보가 없다면, 일본 역사학자의 말처럼 30년이 더 지나야 식민사관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황석역사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한 『황석산성 전투』 내용의 일부를 소설에 차용했다. 부디 이 소설이 우리 역사 바로잡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조율

<조율> 스노우드롭 꽃길을 걸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되던 가난한 나라 부족한 식량으로 주린 배를 우물물로 채우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한겨울에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할 일도 장을 보기 위해서 수십 리 길을 걸어서 갈 일도 없는 편리한 세상 가난한 사람들도 세탁기를 가지고 있고 더 가난한 사람들도 TV는 있는 세상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하루의 시간만 주어지면 못 갈 곳이 없는 세상인데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까? 행복에 겨운 희망찬가가 매일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울려 퍼집니까? 돈 많은 재벌도 자살을 하고 인기 절정의 유명 연예인도 자살을 하고 대통령을 했던 사람도 자살을 하는 세상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막다른 선택을 강요합니까?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또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 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서기 2162년 2월 지구의 종말 북극과 에베레스트는 물론 지구상 어디에도 빙하가 존재하지 않는 지구의 기온은 200년 전에 비해 이미 평균온도가 10℃ 이상 상승하고, 폭풍과 해일, 홍수는 매년 수십 만 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연례행사의 주범이 되고 있었다. 무더위 때문에 생긴 일사병으로 죽는 사망자 또한 수십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 밖 20만km에서의 대폭발은 지구를 우주먼지로 뒤덮어서, 한낮에도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운행해야 할 정도였다. 곡식은 여물다 말아 수확량이 70%이상 줄었고, 지구촌 곳곳은 굶주림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른바 대기근이 시작되고 있었다. 빈발하는 자연재해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장사지내지 못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자가 몇 명인지 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개체수가 수백 배로 불어난 쥐들은 거칠 것이 없는 듯 살아있는 사람마저 먹잇감으로 노리고 달려들었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속수무책으로 그것들에게 희생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저마다의 사람들이 울부짖는 기도소리는 하늘을 진동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처절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아비규환의 지구를 바라보는 올마이티의 눈은 침잠(沈潛)되었다. 타락하지 않은 영혼이 몇 명만 있어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노라고 했던 당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소돔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던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절망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자신과 인간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의 타락이었다. 영적 능력 대신 마음속엔 물질만 쌓이고,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다른 세대의 사악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키리오스로서는 더는 인내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기 2162년 2월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큰 나팔소리와 함께 수만의 천사들이 선택된 사람들을 들어 올리더니 하늘 문은 다시 닫히고, 지상은 일본열도의 침몰을 시작으로 해서 지각판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이로 인한 지진ㆍ해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진멸(殄滅)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천사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 수가 60만 명 정도였는데, 목사와 신부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고 한다. 탐욕과 갈등 대립의 지구의 역사는 사라지고 화성에서 다시 시작한지 501년 지난 500년-지구의 시간으로는 940년에 해당 됨- 동안 화성의 인구는 100배나 증가하여 6천만 명에 달한다. 화성의 자전시간이 지구시간으로 24시간 37분이고, 공전시간은 687일로 태양을 1회 공전하는 동안 670번 자전을 한다. 따라서 화성의 1년은 670일이며, 1일은 윤분을 37분 두어서 마지막 23시는 1시간이 60분이 아닌 97분으로 맞추어 놓았다. 화성의 1년이 지구의 1.88배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계산해서 화성에서의 160살이 지구의 나이로는 300살에 해당된다. 영토는 지구 면적의 1/4 수준인 약 2억 평방킬로미터의 화성이지만 아직도 광활한 땅덩어리에 비해 적은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100가구 남짓한 소규모 마을부터 50만 명의 대도시까지 다양한 모습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공전축과 자전축의 궤도면이 약 25도 기울어져 있어서 화성도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있다. 화성의 기온은 예전엔 표면온도가 -25℃∼5℃ 정도였는데 지금은 20%의 추운 지역을 제외하면 0℃∼30℃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기온이다. 호사가들에 의하면 화성의 지하에 키리오스가 설치했을 것으로 짐작 되는 영구열중성자 흡열로가 있어서 화성의 곳곳에 무한 에너지가 공급되고, 이 에너지로 인해 지하에 얼음상태로 존재하던 엄청난 양의 물들이 지상으로 솟구쳐 올라서 내[川]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니, 마침내 원시지구의 쾌적함이 재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고도로 통제된 사회 화성연방 고구리 공화국 화성에 정착한 지구인들은 지구에서의 역사를 반성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과학의 엄청난 진보는 인간의 수명을 지구 시간으로 300년까지 연장했으며, 각자 능력에 맞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 화성연방은 지구에서의 모든 모순들을 극복한 이상적 사회로 보였다. 화성은 5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도 초창기에 세워놓은 법질서나 사회 규범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정치체제 역시 변함이 없었다. 고인 물은 서서히 썩어가지만 그 속도가 사람들이 느끼지 못 할 정도로 느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그동안 나라 안팎으로 큰 분란이나 전쟁이 없어서 사람들의 눈에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모습에 불만을 품고 변화를 갈망했는지 이번 소요사태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고구리[高句麗]의 학생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싶었지만 직업의 종류와 수를 정부차원에서 통제하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새로운 직업군이 생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그나마 원하는 직업이 있어도 좋은 직장은 이미 자리가 없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뇌물이 횡횡하고 있었는데도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실업률 제로와 부의 분배 문제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의무적으로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되고,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소수의 이익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세상을 리셋하고 싶지 않으세요. 오늘날 지구촌의 망가진 모습은 수습이 불가능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빈부격차의 심화, 자국 이기주의와 자원의 무기화, 선진국들의 힘 있는 자본 앞에 무너지는 약소국들의 처참한 모습들, 인터넷의 폐해와 정신이 황폐해진 인간들의 흉악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 모습 이대로는 가망이 없는 지구를 태초의 모습으로 만들어서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구와 가깝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별, 화성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어떤 모습의 사회에서 생활하고, 아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정치나 경제체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자동차 관련 하청업체에 근무하면서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애환과 청년 실업자들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피부로 느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계층적 세습화에 대한 절박한 감정이 소설을 쓰는 에너지가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중심은 당연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치ㆍ경제체제도 그런 곳이 없는 것 같다. 정치가(혹은 사상가)나 자본가들의 입맛에 따라서 이런 저런 정치경제적 체제가 존재할 뿐, 대다수 나라의 국호 앞에 붙어있는 민주(백성이 주인)는 그저 장식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당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도구로 쓰는 정치는 이 땅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헛된 꿈을 다시금 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