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일
고정일
평균평점
불굴혼 박정희 1 - 먼동

<불굴혼 박정희 1 - 먼동> 꿈이 있는 청춘이여 눈물ㆍ땀ㆍ피! 세계 기적 성공이야기 박정희를 읽어라! 인생을 낭비않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초인의 탄생! 세상엔 초인적 의지와 천재적 역량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듯, 박정희는 난세에 태어나 인고의 세월을 떨치고 겨레를 가난에서 구해내 선진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1인당 GNP 78달러였던 세계 최빈국 한국을 굶주림과 혼돈에서 건져내기 위해 목숨걸고 앞장서 5.16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ㆍ자본주의를 누릴 수 있는 바탕을 다진 박정희에게 친일과 독재의 올가미를 씌우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목으로 역사를 거꾸로 세웠습니다.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 실용정부 등 화려한 수식어를 내세운 치졸무쌍 작태는 나라를 지난날 맹목과 가난의 질곡으로 다시 몰아넣으려 합니다.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 박정희는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발,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렸습니다. 그에겐 무엇보다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이란 근대적 선진문화였습니다. 그즈음 선진문화 하나가 일본군사체제였기에 만주군관학교로 달려 갔습니다. 적진 소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불을 훔치러 간 ‘프로메테우스 행보’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제대륙침략선봉 황야의 늑대 이시하라 간지, 천황의 여우 기시 노부스케 두 걸물의 만주국건설 산업경제개발방략과 근대적 국가통략을 공부합니다. 혁명 그리고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 4.19로 집권한 민주당은 이승만 시대보다 더 무능 부패했습니다. 무너지는 법질서 속에서 시민들은 ‘배고픈 자유’의 허망함에 절망했습니다. 6.25를 겪은 국민은 북한 김일성을 따르자는 공산선동에 “군은 나서지 않고 뭣 하느냐” 나무랄 정도였습니다. 박정희와 젊은 장교단은 이 국민여망과 시대정신에 응한 것입니다. 민주주의 탄생지인 서구와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제도적 가치관이 다른 신흥개발국가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먼저 경제발전을 통해 국민생활과 교육수준을 높이고, 의식구조가 변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가 착안한 ‘따라잡기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경제성장 없는, 산업화 없는 근대화 민주화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민주주의에 불과합니다. 박정희는 관념론적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학적 물질 바탕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박정희를 독재자로만 매도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거꾸로 역사에서 소외될 것입니다. 이용후생의 신화정권! 박정희 정권은 국가의 생산력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역대 어느 정권보다 획기적 신화적인 정권입니다. 이용후생 측면에서 국민의 의식주 개선과 소득향상에 가장 충실했던 정권입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과학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공업이 강조되고 문화의 물질적 하부구조가 새로운 기반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2차대전 뒤 독립한 나라 가운데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이는 압축성장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우리민족의 저력을 증명합니다. 철저한 군인정신에서 화랑정신을 부활시킨 박정희는 민족주의를 기초로 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시 그 구체적 실천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에르하르트 서독수상의 눈물! 한국경제를 일으키자면 포항제철 울산공업단지를 세우고, 배(조선)도 자동차도 만들고, 반도체 IT산업도 육성해야 하는데, 우리에겐 돈이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반대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한일회담 대일청구권 문제를 관철,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때 우리에겐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나먼 서독으로 우리 간호사 광부를 보내야 했습니다. 한국 간호사들은 시체를 닦고, 광부들은 지하 4,000m 지열 속에서 석탄을 캐내야 했습니다. 이를 위문하고 차관을 구하려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는,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는 울음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과 간호사, 광부들의 눈물로 강당 안은 곧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그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에르하르트 서독수상이 눈시울 붉히며 “아! 저런 민족, 저런 지도자가 있는 나라라면 우리가 차관을 줬다가 돈을 떼여도 좋다” 외쳤다 합니다. 경제혁명!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건설! 1970년 농가의 80%는 초가지붕이었고, 전기 들어오는 집은 겨우 20%였습니다. 박정희가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워 이끈 새마을운동은 이런 농촌의 인프라를 다지고, 농가소득을 월등히 증가시켰습니다. 오늘날 관념적 자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 새마을운동은 아직도 유효하며 거창한 민주주의나 통일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입니다. 1970년 7월 7일에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착공, 2년 5개월 만에 개통됐습니다. 건국 이래 최대 역사로 총공사비는 국가예산의 23.6%에 이르렀으나, km당 약 1억 원으로 전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유례 없는 싼 가격이었습니다. 기차로 15시간 걸리던 것이 4시간으로 줄었고, 그에 따라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고 물류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서 경제발전 기폭제가 됐습니다. 김대중은 기공식날, 양재동 공사장 기중기 앞에 드러누워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면 나라 망한다고 온몸을 던져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민주화를 빙자한 정치선동꾼들 온갖 방해에도 백년을 내다보며 굳세게 밀고 나아가 국가산업의 대동맥을 완성했습니다. 양날의 칼 중화학공업 핵개발 도전! 시월유신이 공포된 1972년, 중국.북한.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민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민주주의 본산 영국은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연방선거권을 박탈하고 재판받을 권리도 주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부르짖던 케네디 대통령과 킹 목사가 한낮에 암살당하고, 반민주적 반인권적 인종차별이 버젓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런 세계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한국의 바람직한 민주화 구현수단으로 경제발전부터 추진했습니다. 그가 유신과 중화학공업이라는 ‘양날의 칼’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의 기적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경제철학 밑바탕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시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시장의 이점을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둘째, 놀라운 수완으로 기업가를 통제했습니다. 그 깐깐한 이병철과 배짱 좋은 정주영도 자신 없어 못하겠다는 것을 박정희가 윽박질러 만들게 한 게 오늘 세계제일 삼성전자 반도체.현대조선.현대자동차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돈 벌어들인 대통령 경제와 과학에 남달리 뛰어난 박정희는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을 후원 한국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대통령이지만, 돈 자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청빈했습니다. 청와대 화장실 양변기 물통엔 벽돌을 넣었고 에어컨 대신 부채를 썼습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은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한국이 경제개발에 성공했을 거라 했지만, 그들의 부패정치행태 경제구상으로 밀고 나갔더라면 세계적 기업 삼성.현대.LG의 오늘이 있었을까요? 박정희가 떠난 지금 한국정치는 민주주의를 구호로만 외치는 함량부족 정치인, 이익집단 군중선동, 포퓰리즘 등으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유신시절 재야그룹의 중심인물 백기완은 이런 말로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박정희는 우리 같은 운동권들을 못살게 했지만, 당장 민주화를 부르짖는 정치꾼들은 국민 3천만 명을 못살게 했다.” 1970년 사상계 오적(五賊)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저항시인 김지하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요즘은 오적보다 더 무서운 오십적, 오백적(五百賊)이 설쳐요. 여러 부류 사람들이 온갖 도둑질을 하죠. 내 나이 72세에 오백적을 쓰고 또 감옥에 가야 합니까!” 일리노이대학 교수 김상기는 박정희의 위대함을 이렇게 정의 내렸습니다. “그는 오로지 철두철미 권력의 논리만을 따라 통치권을 극대화하여 경제개발을 박력 있게 이끌었다.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절대빈곤국가에서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다.” 박정희를 벤치마킹한 덩샤오핑! 세계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를 벤치마킹 국가경제를 일으키려 노력합니다. 덩샤오핑은 박정희의 외교.경제정책을 본받아 실사구시 개혁개방 전략을 구사, 미국과 협조적 외교관계를 유지 중국을 다국적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천안문사태 때 탱크군단을 동원, 민주화를 열망 광장에 운집한 100만 학생시민에게 발포해 2천여 명을 사살, 1만 2천 명 부상자 참사를 빚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 추앙합니다. 푸틴은 공산체제를 개방한 러시아가 경제난에 빠지자 박정희 경제정책 관련 서적들을 연구, 경제를 살려낸 공적으로 대통령에 재선되었습니다. 리콴유는 국민의 인권.언론을 통제, 길거리에 휴지 한 장 버려도 곤장 20대, 마약소지자는 사형 무시무시한 형벌로 국민을 다스려 싱가포르를 아시아 최고 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듯 모두 강력한 통치를 펼쳤지만 국민은 그들을 독재자라고 비난하지 않으며 나라경제를 살린 영웅으로 우러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스러져가는 국운을 되살려 세운, 질곡의 5천 년 ‘우리 역사가 낳은 지도자’입니다. 고조선 단군 때부터 내려온 한민족 얼에 열정의 불을 지핀 프로메테우스입니다. 한국인은 신명이 나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작사작곡한 ‘새마을노래’로 국민들의 신기(神氣)를 불러일으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로써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박정희 비전의 핵심은 “비르투(Virtu)가 포르투나(Fortuna)를 이긴다”는 마키아벨리의 명제로 요약됩니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갑작스런 정치변동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을 가장 훌륭한 정치능력이라고 했으며, 이것이 바로 ‘비르투’입니다. 남성적이고 지도자적인 덕목 또는 전사적 기질을 뜻하는 비르투가 우연과 불확실성의 상징인 포르투나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신념’으로 ‘운명’을 이겨낸 박정희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의 본보기입니다.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다! 민족시인 이은상이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 놓은 인물로 역사가들이 평가할 것이다. 성군 세종은 한글창제를 비롯 내치(內治) 외치(外治)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성웅 이순신은 적과 맞서 싸워 이긴 장수이며 자기 몸을 죽임으로써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백 번 싸워 백 번 다 이김이 최상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으뜸이라 했다. 오늘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박정희는 북한의 김일성을 싸우지 않고 이긴 사람이다.” 박정희는 1970년대 경제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마침내 자신감을 갖고 유신을 단행, 중화학공업과 핵개발에 들어갑니다. 박정희! 그라고 어찌 인간적 결함과 실책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박정희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백척간두 휘몰아치는 광풍 앞에 결연히 맞서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국인의 마음에 신바람을 불어넣은 「불굴혼 박정희」를 찾아갑니다. 나는 사람들이 한번도 치우려 하지 않는 겹겹이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염된 지역 전체를 삽으로 퍼내듯이 모든 사회악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홍수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헌정제도를 운영하면서 과거의 행동을 겸허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비능률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았을까? 때때로 자유를 방종과 혼돈하지 않았을까?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독재라는 이름으로 비난하지 않았을까? 파쟁과 갈등을 민주주의로 착각하지 않았을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란 탄탄한 경제적 바탕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경제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정치나 문화보다 중요하다. 민족우선주의 정책과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리더십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경제제일주의, 건설우선주의 그리고 노동의 신성시 등의 가치는 더욱 고양되고 북돋아져야 한다. 혁명의 기본적 요소는 한국의 산업혁명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나의 주 관심은 경제혁명이었다. 인간은 우선 먹고, 숨쉬고 나서 비로소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나를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

이중섭

<이중섭> 사랑하라! 우리가 불행한 것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무의 몸을 입은 그대여, 미쳐야(狂) 미치(及)는 것을 아는가! 하루살이 삶이여, 아낌없이 사랑하고 후회없이 노래하라! 거짓에 가려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가의 진실! 불알에 소금 뿌려 절이고 햇볕에 말린다, 오래 쓰지 않으면 상하니까 남덕아 아들아 훌렁 벗고 한 몸 되어 뒹굴며 놀자꾸나 소달구지 태워 고삐 잡고 먼 남쪽나라 하염없이 떠나련다 차디찬 한겨울 뜨끈한 국수 한 그릇 훌쩍훌쩍 들이켜니 앙상한 벌거숭이 구들장 쿵쿵 울리며 소처럼 껑충껑충 뛰노네 지고의 경지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여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최상이 아니었던가! 짧은 생애 짧은 사랑 짧은 작품, 더없이 깊고 넓은 아름다움의 감동 이데올로기 암울한 시대 처절한 삶 끝내 빛을 잃지 않은 순수의 영혼 예수 닮고 성자 닮은 불세출, 모두를 숨 쉬게 하는 예술과 사랑! 가족들이 탄 소달구지를 앞에서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함께 가겠다는 이중섭의 애타는 심정이 담겨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서 따뜻한 보금자리를, 한(恨)이 어린 갈망이다. - 서울대 미대 교수 임영방 바다는 밤에 혼자서 운다. 게 한 마리 눈이 멀어 달은 늦게 늦게 뜬다. 아내는 모발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 시인 김춘수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예술은 타고난 것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찌 그런 것을 생각해내고 표현하는지, 말 그대로 참된 개성이요 민족예술이다. - 화가 김환기 이중섭은 오직 자기예술추구와 수호를 위해 평생을 전력투구했다. 그처럼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지켜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시인 전봉건 이중섭 예술이 어디다 뿌리를 박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헐벗고 굶주린 한 그루 나뭇가지에 서린 그의 슬픔과 생장하는 자태뿐이다. - 시인 김광균 흔히 천재의 최후는 비극이어야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그 점 중섭의 만년은 비극으로 막 내렸으니 명실공히 천재다운 죽음이었다. - 국립현대미술관장(전) 이경성 중섭은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서, 부두일하다 쉬면서, 합판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 연필과 못으로 그렸다. 외로워도, 배고파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시인 구상 2013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현대회화100선’ 관객 1000명 대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설문조사결과, 이중섭〈황소〉가 1위로 꼽혔다. - 조선일보 순수의 사람! 바보의 사람! 이중섭 사랑하라! 우리가 불행한 것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절한 천재화가 이중섭!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그의 요절을 가슴 아파하고 그 미술에 대해 두터운 애착을 느끼며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예술과 사랑의 참뜻을 안 사람이자 그것을 실천하여 이루려 몸부림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 예술과 삶으로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의 감성을 움직이고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한 미덕과 품성을 지닌 사람. 미쳐서야 미친 그는 짧은 생애 짧은 사랑 짧은 작품 그러나 더없이 깊고 넓은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케 한다. 신이나 이성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전쟁과 이데올로기 암울한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이중섭은 인간을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혼을 더럽히지 않은, 바보스러우리만치 순수했던 사람이 바로 이중섭이었다. 질곡의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수많은 걸작들 새로운 시대의 회화를 성취한다는 의식 속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애처로운 사랑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투쟁을 작품으로 남겼다는 데에 이중섭 불굴의 명성과 인기의 비결이 있다. 그의 예술창작에 대한 정열적인 의욕은 그 무렵 사회적 혼란, 극한적인 삶의 어려움, 가족과의 생이별 등으로 끝내 좌절되고 충분히 꽃피우지 못했다. 이중섭은 보통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할 가장 처절한 밑바닥 삶 속에서도 꿋꿋이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비좁은 골방에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 엎드려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마분지?담뱃갑?은종이에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도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제주도?통영?진주?대구?서울 등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래서 수채화?크로키?데생?에스키스 등 200여 점, 은종이그림 300여 점이 이 한국 땅에 남아 현대 미술가, 아니 모든 예술가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중섭만의 그림 세계를 이루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를 닮고 성자를 닮은 처절한 시대의 예술가 이중섭은 고독하고 우수에 찬 예술혼, 아내와의 농염한 애정, 아들들과의 행복한 놀이, 티 없이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낭만적인 무릉도원의 세계를 아로새긴 천재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중섭은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전쟁과 분단에 분노한 평화주의자요 사랑에 가득한 민족혼의 화가이기도 했다. 악한 세력에 꿋꿋이 맞서는 절절한 민족혼과 애통해하는 시심이나 염원을 이중섭의 모티프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다. 이중섭은 정말 그런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어째서 그러한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중섭이 예수를 닮았으며 암울한 시대를 밝혀 나간 성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우라가 그에게서 풍겼기 때문이 아닐까. 그 처절한 삶과 기행(奇行) 그리고 뛰어난 예술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화가는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던 것처럼 모두의 곁을 떠나갔다. 그날, 소설가 김이석은 홀로 떨어져 서서 저 멀리 흐르는 한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말없이 뇌었다.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중섭의 사랑과 천재를 찾는 로망스!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뒤 주위 사람들은 굳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굳이 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이중섭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입을 다문 탓에, 오히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함부로 지어낸 일화들이 곳곳에서 희화화된 것이다. 이것은 그냥 놔둬선 안 될 일이다. 이제 이중섭의 삶을 되짚고 그의 사랑과 천재의 진실을 찾는 일은 그를 기리고 그의 그림을 아끼는 모든 이의 숙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매혹된 혼 최승희」「불굴혼 박정희」 등 한국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품에 평생을 바쳐 온 고산고정일의「이중섭」은 그 큰 한 걸음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