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 “지금부터 곧장 하나다 군의가 있는 곳으로 간다. 너도 따라와.” 그러고는 조금 사이를 두고 “부대장 명령으로 하나다를 총살하기로 했다. 단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긴장의 빛이 일순 타카기의 얼굴을 스쳤을 뿐, 이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 같았다. “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고 내 방으로 와.” 경례를 하고 물러가려고 하는 타카기의 뒷모습에 대고 우지는 뒤이어 다시 불렀다. “――권총도 지참해. 그리고 신변용품 중 중요한 것들도 챙겨오고.” 타카기의 의심에 찬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우지는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발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로 타카기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지도> 쇼조는 단도를 꺼냈다. 지도를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하나로 이어서 목을 맬 작정이었다. 이미 교무실에 있을 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두루마리 지도를 찢어 그걸로 목을 매어 죽자.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죽고 싶다. 그런 원망(願望)을 애써 마음속에 기복(起伏) 시키며 교사의 질책을 외면했다. 재봉실의 풍경은 허름했다. 큼지막한 대들보가 시대(時代) 아래로 먼지를 모으고 있다. 사실 거짓 협박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며 죽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죽는 방법이 가장 쇼조의 맘에 들었다. 재봉대를 쌓아놓고 가늘게 찢어놓은 지도를 걸었다. 그제야 누나가 보고 싶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책 속에서-
<수국> 현관에는 큰 꽃다발을 품에 안은 행복한 표정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저어”하고 노인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노인의 입에 치아는 거의 없었다. “꽃 배달을 왔습니다.” 꽃은 수국이었다. 수국으로만 된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꽃?” 검은 양복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동작을 했다. “누가 부탁한 거요?” “그게. 이 댁 부인께서 어제 오셔서.” 꽃집 노인은 검은 양복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제, 오후에 이 꽃을 꽃다발로 만들어 보내달라고 하셔서…….” 물을 끼얹어서 가져온 듯 다양한 색깔이 섞인 꽃들에서 물방울이 바닥에 똑 똑 떨어졌다. -책 속에서-
<바지락> 일본은 구제불능이네. 이렇게 좁아터진 땅덩이에서 이렇게 엄청난 인구가 살아가야 하다니. 일본은 배낭 속에 든 바지락이고 만원 전차일세. 일본인의 행복의 총량은 극에 달했네. 한 사람이 행복해지면 그 분량만큼 누군가가 불행해진단 말이지. 마침 사내가 떨어졌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에게 여유 공간이 생긴 것처럼 말일세.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기원하기보다는 타인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라네. 존재하지도 않는 행복을 추구하기에 앞서 주변 사람을 불행에 빠뜨려야 하는 거라네. 우리가 생물인 이상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최상이요 그 밖의 사념은 감상일 뿐이네. 단추를 움켜쥐고 있는 시체와 울어대고 있는 바지락과 말귀가 어두운 마누라와 이 몸, 그것들은 추악한 구도일세. 추악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걸세. 천박한 선의라든가 의협심을 마음속에서 적출해 내고 나는 살아가리라고 그때 생각했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