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군기> 문학을 좋아하니? 영근 보리밭 걷노라면 멀리 간 누나 생각나네 풋풋한 내음 가득 번지면 몰래간 누나가 그립네 아마도 중학교 갓 들어갔을 때인가. 나를 퍽 귀여워 해주던 사촌누나를 그리워하며 지은 습작 시인데 어렴프시 기억나는 대로 적어봤다. 그 무렵 나는 옆자리 단짝과 종종 시랄 수도 없는 시를 써서 공책을 책자처럼 엮어 서로 보여 주곤 했다. 그 재미는 실로 단감 맛이었다. 그러던 여름방학 때였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형의 친구가 우리 집으로 놀러 오곤 했는데 어느 날 그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너 문학 좋아하니?” 하며 소위 나의 시작 노트를 내놓았다. 책상에 뒹구는 것을 발견 읽어 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날 이후로 그는 형과 어울리기 보다는 나와 함께 있기를 즐거워했다. 그리고 보들레르니 카프카, 소월의 시 세계 등 소위 문학 특별 강의에 열 올렸다. 한데 나는 그와의 대화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친구들과 한창 뛰어 놀 때고, 그의 얘기가 따분하고 이해도 되지 않아 지겹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나를 만날 때마다 문학 강의를 했고 어느새 나는 그에게 세뇌당해 결국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분명 그는 내가 문학의 눈을 싹트게 한 분이었다. 십 오 육년 지나 나는 인간의 속성과 개의 속성을 비유해가며 개보다 낫지 못한 인간들의 횡포를 그린 작품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연이어 이런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했고, 작가 프로필에선 ‘동물의 세계를 의인화하여 인간의 권위, 비정함을 파헤치는 작업을 한다’는 소개를 하곤 했다. 착하고 온순한 개가 도둑을 지키지 못해 주인의 학대를 받으며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위해 몸부림치다 미친개로 몰리는 개. 쥐를 통해 인간의 오만과 인간에 동조한 동물들의 간교함을 풍자하고, 이(슬보)를 통해 인간의 추한 단면을 들추어내어 미물보다도 나을 데가 없는 인간을 조소했다. 우리에게 사탄이라고 저주받는 뱀을 통해 인간의 간악한 음모와 모략을 그렸다. 이것들이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인간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읽는 길이기도 했다. 한데 동물들을 내세워 인간을 고발하는 수법이 때론 의도적이어서 내심 불만이었다. 이에 회의를 느끼면서 가끔씩 반항하듯 다른 방향의 소설 쓰기를 꾀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우화소설이든 아니든,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사회에 진입하여 하나의 사회적 인간으로서 살아가기까지 겪을 수 있었던 정신적 상흔은 너무도 우울 했고 그 현장을 표현하는 나의 마음은 마냥 스산하기만 했다. 이쯤에서 나는 인간을 속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자유를 으깨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어 평가 받고 있는 것에 어떻게 발버둥쳐야 하는가. 인간끼리 부딪치며 서로를 마멸시키는 것들을 어떻게 조명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추적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에 대한 확인에 나는 잔뜩 주눅 들어 있다. 이제 새삼 형의 친구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로부터 “너 문학 좋아하니?” 지겨운 말을 듣고 싶다.
내가 쓴 소설에 빙의했다.하필이면 여자 주인공을 질투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악역 엘리노어로.그러니까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방해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남자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것도,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도 그만뒀다.두 사람이 이어지도록 빠져 줬으니사치스럽고 평화로운 공작가 영애의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엘리노어, 당신을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를 싫어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줄리안이 관심을 보이고, “그리핀 양,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이쪽으로 오세요.”수동적이어야 하는 여자 주인공 루나가 나를 견제한다.내…… 내가 놓친 게 뭐지?내가 설정한 캐릭터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내가 쓴 소설에 빙의했다. 하필이면 여자 주인공을 질투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악역 엘리노어로. 그러니까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방해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남자 주인공을 쫓아다니는 것도,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도 그만뒀다. 두 사람이 이어지도록 빠져 줬으니 사치스럽고 평화로운 공작가 영애의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 “엘리노어, 당신을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를 싫어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줄리안이 관심을 보이고, “그리핀 양,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수동적이어야 하는 여자 주인공 루나가 나를 견제한다. 내…… 내가 놓친 게 뭐지? 내가 설정한 캐릭터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