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서 온 소녀 > 천오백 년 전 가야 소녀를 만나다 2007년, 옛 가야 땅인 경남 창녕군 송현동 가야 고분군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인골이 발굴되었다. 과학의 힘을 빌려 소녀의 등신대가 만들어졌고, ‘송현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후 송현이는 가야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은 ‘가야에서 온 소녀’ 송현이를 통해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그리고 있다.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가야의 역사와 문화, 가야 사람들의 삶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책 속에서> 그 가슴 벅찬 일, 비사벌 육백 년 역사를 담은 비사유록比斯遺錄을 적는 일을 도왔던 존재가 나였다. 그런데 지금 내 육신은 날마다 살아 있는 것이 모욕임을 일깨워 주는 이곳 신전에서 목숨을 이어 가고 있다. 어쩌다 내 인생은 이렇게까지 영락했을까.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지난 세월을 더듬어 간다. 신녀「비사유록」에서 우리 동네, 소벌 기슭에는 밤마다 춤판이 벌어졌다. 소벌 물결 위에는 별이 번지고 별똥별이 흐르고 반딧불이가 춤을 추었다. 밤을 밝히는 빛은 낮으로 이어졌다. 금빛 햇살이 온종일 내려앉아서 그 넓은 소벌이 온통 반짝이는 햇살 밭처럼 보였다. 새까만 몸에 노란 끝동이 달린 붉은 부리를 한 쇠물닭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오르면 놀란 물결이 재잘거리며 퍼져 갔다. 별처럼 샛노란 노랑어리연꽃이 가득 핀 기슭까지. 송이「소벌 기슭」에서 가야라는 존재를 모두 쓸어버린 것을 기념하는 연회는 은성하기 그지없었다. 궁궐 큰 마당에서 무희는 춤추고 광대는 재주넘고 화랑도들은 검술을 뽐냈다. 매화를 넣어 내린 향기로운 청주를 푸른 유리병에 담아 흰 유리잔에 넘치게 붓고 또 부었다. 문득 몇 해 전에 내 집을 향해 목을 매단 소비가 생각났다. 그 사람도 지금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제 아비가 죽은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 끌려 나왔던 백제 여인과 가야가 멸망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에 나와 있는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무력지「미안하다, 송이야」에서 꽃 피는 봄날에 웬 눈일까? 분홍 진달래 위에, 나비처럼 꽃잎처럼 흰 눈송이가 날렸다. 꽃이 눈 같고 눈이 꽃 같았다. 눈에서 꽃향기가 나고 꽃에서 눈 냄새가 났다. 눈 위에 오종종하니 새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새는 영혼을 실어 나르는 존재라고 했지. 내 넋이 되살아난다면 새가 되고 싶다. 훨훨 날고 종종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까. 엄마 아버지와 이모와 임금님이 만들었다는 비사유록, 꼭꼭 숨어 있는 그 조각을 찾아내 입에 물고 와서 임금님께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송이「작별」에서 때때로, 한없이 미안하고 끝없이 무참한 내 가슴에 울릴 송이의 목소리. 내 조롱 속에 날아들었다가 울면서 떠나간 한 마리 어여쁜 새. 내 영혼과 그 아이의 영혼,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그때 송이의 이번 생, 열여섯 짧은 생애를 그 노랫소리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찬찬히 들어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바라기는 종적을 감춰 버린 죽간, 비사벌과 가야의 역사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꿈같은 날이 오기를. 무력지「기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