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나기> ― 소설가 10년, 번역가 20년. 제주 귀향 이후 그가 작가 인생 제2막을 시작하다 ―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무척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보고 싶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괄호 열고 닫기」 주인공 ‘나’는 대학생 시절에 미대 졸업전시회에서 만난 어떤 그림에 기묘한 인상을 받아 충동적으로 그것을 훔친다. 그 후 ‘나’는 군 입대와 이사, 결혼 등을 거치면서도 소중하게 그림을 보관해왔다. 십수 년이 훌쩍 지나 소설가가 된 중년의 ‘나’는 어느 잡지에 그 그림을 훔쳤던 사건을 비틀어 살을 붙여 다른 이야기로 꾸며서 글 한 편을 기고한다. 그런데 그 글이 발표되고 난 후 어떤 낯선 이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하는데……. 상상력이 만들어낸 해답은 사실 정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상상력은 정답을 무너뜨린다. 정답을 해체시키고 무화시키는 데서 상상력은 그 자신의 몫을 거둔다. 나는 그림을 훔쳤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두 줄로 나뉘어 섰다. 나는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그림을 사진으로 바꿔치기했다. 두 줄로 나뉘어 선 유대인들은 소독실로 또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림의 임자가 나타났다. 며칠 전이다. 내 수필이 실렸던 잡지사의 후배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한테 전해달라는 편지가 와 있다는 것이었다. “편지?” “미국에서 보내왔어요. 발신인은 조명곤.” 나는 후배가 들려준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내용이 뭔데?” “남의 편지인데 함부로 뜯어볼 수 있나요? 하여간 형한테 전해 달라고 겉봉에 적혀 있어요.” 「하루나기」 중년의 샐러리맨 ‘김종인’은 토요일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지하철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인사를 한다.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자 삼진기획 부장인 ‘염승섭’은 얼결에 같이 인사를 하지만 상대방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전 직장 상사의 딸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염승섭’은 대학 동창 ‘현진걸’을 17년 만에 만난다. 도서출판 천야의 주간으로 있는 ‘현진걸’은 그의 번듯한 명함을 보며 괜한 자격지심을 느낀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고교 동창 ‘이효식’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그를 맞이한다. 그러나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하고 사장이 내민 번역 소설을 급하게 작업해야 할 상황에 놓인 ‘현진걸’은 부랴부랴 번역가 ‘채만석’에게 전화를 거는데……. 대화의 마지막 주제는 ‘중년의 꿈’이었다. 인생길 반 고비에 이르러 이제는 내리막에 들어선 나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왠지 허무하고, 뭔가 새롭게 시작하려 해도 두려움의 벽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주저앉고 마는 나이. 바람 한 줄기에도 그게 태풍의 낌새인 줄 알아채고 재빨리 움츠리는 나이. 뒤에서는 떼밀리고 앞에서는 짓눌려 숨막힌 세대. 아무리 그렇더라도, 중년이라고 꿈이 없을 것인가. ‘파초의 꿈’도 있고 ‘갈매기의 꿈’도 다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