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복암 시고> 지만지한국문학의 <지역 고전학 총서>는 서울 지역의 주요 문인에 가려 소외되었던 빛나는 지역 학자의 고전을 발굴 번역합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의 문화 자산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지역 학문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 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식 지도를 만들어 나갑니다. 13세에서 19세, 조선 시사에 족적을 남기다 ≪관복암 시고(觀復菴詩稿)≫는 관복암 김숭겸이 13세부터 19세까지 쓴 시를 엮은 것이다. 242제 299수의 시와 숙부인 삼연 김창흡이 지은 서문, 부친 농암 김창협이 지은 묘표가 함께 실려 있다. 10대에 지은 시들만으로도 시명이 널리 전했으니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김창협은 그의 시를 ‘기발하고 노숙하며 낯익은 표현을 짓지 않았다’고 평했고, 김창흡은 ‘우뚝 초일한 기운이 법식의 구속을 받지 않고 능히 스스로 법을 이루었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써 내려도 자연스레 대구를 이루고 평측이 공교롭게 드러났다’고 칭찬했다. 청장관 이덕무는 재기로 볼 때 취헌 김유보다도 월등하다고 평했다. 자연 가운데 홀로 외로움을 느끼다 관복암 김숭겸은 조선 후기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친 농암 김창협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삼연 김창흡을 비롯한 그 형제들도 모두 학문과 문예가 뛰어나 소위 ‘6창(昌)’으로 불리며 칭송받았다. 김숭겸도 이러한 부친 및 백숙부들의 피를 이어받아 시에서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그의 시 세계는 ‘고적(孤寂)’으로 일관된다. 무엇이 그의 짧은 인생을 쓸쓸함과 우울함으로 채웠을까? 김숭겸의 시는 부친 농암 김창협을 모시고 영평 농암, 양주 석실 서원, 미호, 삼각산, 강도, 송도, 백운산, 삼주 등에서 강학하며 지내거나 홀로 유람하면서 지은 것들로, 태반이 자연시다. 그는 본연의 외로움을 강물과 새, 계절 변화를 통해 드러냈으며, 지인과 함께한 뒤에도 결국은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고적함을 드러내 자신만의 서정 세계를 일궈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