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발췌 무성희> ≪무성희≫는 중국 청대의 대중 작가였던 이어의 소설집이다. 이어는 연극배우, 거지, 하급관리, 몰락한 양반 등 서민들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을 내세워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대변하고, 그것을 소설적으로 구현한다. 제목의 ‘희(戱)’가 가리키는 것처럼 그것은 한낱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실하고, 이야기의 바탕이 된 현실 역시 희(戱)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작품을 읽으며 우리의 그것과 놀랍게도 닮아 있는 당대인들의 소망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전체 18편의 단편 중에서 4편을 선별해 모두 옮겼다. 번성하던 시대 속에서 무성하던 이야기들 ‘소리 없는 연극’이라는 뜻의 ≪무성희≫는 17세기 중반 당시 대중적인 인기 작가였던 이어(李漁, 1611∼1680)에 의해 창작되고 간행되었던 단편 백화소설(白話小說) 작품집이다. 16세기를 전후하여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소설과 희곡의 출판 열기는 17세기에 들어서 고조기를 맞이한다. 역사연의(歷史演義), 신마소설(神魔小說), 인정소설(人情小說),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 공안소설(公案小說) 등 다양한 제재의 작품들이 출현했고, ‘사대기서(四大奇書)’의 가장 인기 있는 판본도 이 시기에 출현했다. 이는 당대 중국의 상업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서 사대부 중심의 문화와는 다른 서민층을 위한 문화 상품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인쇄술의 발전 또한 이를 뒷받침했으며, 그 결과 출판업이 크게 성행했다. 서구 문명이 내부적인 성숙을 끝내고, 외부에 대해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중국은 경제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나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어가 활동하던 시기의 중국에서는 근대 이전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이 들어서서, 문명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명 왕조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를 제패한 청 왕조는 성군들의 시대를 거치며 흡사 2차대전 이후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제국으로서 풍요와 영광을 만끽했고, 자연스럽게 그 번영의 몫이 서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 욕망의 속성상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마련이다. 이어가 활동하던 시대가 꽃피웠던 것 무성한 이야기들도 바로 그런 풍요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이야기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으며, 불가능을 비웃으며,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현실에서는 평범한 서민일지라도 이야기 속에는 왕후장상이나 재자가인이 되어 제 마음대로 살아볼 수 있다. 호구지책을 해결한 서민들이 장터 어귀의 재담꾼들 주위에 모여앉아, 혹은 극단의 무대 앞에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소망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어와 같이 관료가 되지 못했던 문인들은 이제 서민들과 함께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욕망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작가 의식과 상업적인 요소의 절묘한 조화 작가이면서 동시에 출판업자였던 이어의 소설은 진지하고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담은 고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아속(雅俗)의 접점에서 이야기의 재미와 적절한 교훈을 추구했던 통속적인 읽을거리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기존의 소설에서 관행적으로 쓰였던 것과는 다른 양식, 차별적인 인물들과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제1편 <무대에서 꽃피운 두 연극배우의 사랑>과 같은 작품에서 이어는 재자가인 소설의 상투적인 패턴에 변화를 주어 독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우선 이 작품의 여주인공 유막고(劉藐姑)가 기존 재자가인 소설의 여주인공들과는 달리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 배우라고 하는 천한 신분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새롭다. 또한 이 작품은 남녀 두 배우가 현실 속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무대에서 허구적인 성격의 공연을 통해 나누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사랑이 현실로 맺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소설들과는 달리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또한 ‘개장시(開場詩)−입화(入話)−정화(正話)−산장시(散場詩)’와 같은 화본소설(話本小說)의 일반적인 양식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도입부를 생략하고 단지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자식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본 사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대체로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하는 입화 부분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이어는 소설을 통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상의 가치와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그것을 뒤집어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자신의 판단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청렴한 관리가 탐관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관점, 운명은 타고난 것이지만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생각, 의리를 지키고 선행을 실천하는 거지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관리와 향신(鄕紳)을 비판하려는 인식 등에서 우리는 그의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어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이런 새로움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은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소설에 식상했던 독자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독자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과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기존의 통념과 가치를 뒤집어 보려는 관점과 서술자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의 상식과 예상을 깨뜨리는 인물의 설정과 반전을 통해, 단순히 이야기의 재미만을 추구하려는 이야기꾼의 모습이 아닌 문인으로서 작가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원서발췌 열두 누각 이야기> ≪열두 누각 이야기(十二樓)≫는 청대의 저명한 희곡 이론가이자 비평가이며 소설가이기도 했던 이어(李漁)의 단편소설집이다. 현존하는 이어의 소설 중에서 가장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제목이 시사하듯 열두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마다 누각이 등장해 전체 작품이 연관성을 띠고 있어서 ≪열두 누각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이다. 이 소설집은 ≪각세명언(覺世名言)≫이라고도 부른다. 이어가 각세패관(覺世稗官)이라고 자칭하며, 작품 내용에 권선징악적인 사상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열두 누각 이야기≫의 제재는 상당히 다채롭다. 등장인물을 보면, 고관대작에서 미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두루 형상화했고, 그 내용에 고상하면서도 속된 이야기를 모두 수용해 이야기 구성이 흥미로우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진다. 또한 이야기의 줄거리 안배 역시 뛰어나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새로우면서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할 정도다. 이어는 ≪열두 누각 이야기≫의 매 도입부에서 인정세태(人情世態)나 인간의 도리 등 전체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송대, 원대, 명대의 사건을 배경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처지와 운명, 이상 등을 묘사했다. 열두 편 이야기는 <합영루(合影樓)> 3회, <탈금루(奪錦樓)> 1회, <삼여루(三與樓)> 3회, <하의루(夏宜樓)> 3회, <귀정루(歸正樓)> 4회, <췌아루(萃雅樓)> 3회, <불운루(拂雲樓)> 6회, <십근루(十巹樓)> 2회, <학귀루(鶴歸樓)> 4회, <봉선루(奉先樓)> 2회, <생아루(生我樓)> 4회, <문과루(聞過樓)> 4회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열두 편의 이야기 중 다음 세 편을 소개했다. <합영루>: 남녀 사이에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 원수처럼 지내 온 두 집안의 남녀가 물에 그림자를 띄워 사랑을 나눈다. 틀에 찍어 낸 듯 꼭 닮은 외모가 단번에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이라 그렇게 경계하고 또 경계했건만 둘의 그림자까지 단속하진 못해 결국 일을 만들었으니, 이렇게 된 바에야 아이들을 탓하는 것도, 그 부모를 욕하는 것도 다 쓸데없다. <탈금루>: 혼인을 결정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부부가 어렵게 어여쁜 두 딸을 얻었으나 혼인을 결정할 때 신중하지 못해 소송에 휘말리고 말았다. 부모의 경솔함이 두 딸을 비운에 빠뜨렸으나, 신중한 관리가 나서 두 여인에게 좋은 짝을 찾아 주니 만사가 겨우 제자리를 찾게 된다. 자고로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결정에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십근루>: 좋은 기회와 인연은 오래 기다려야 얻는 법 선인으로부터 ‘열 번의 합환주’를 예고 받은 젊은이가 있다. 열 명의 처첩을 얻어 백년해로할 줄 알았더니 아홉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짝을 얻을 운일 줄이야. 오래 참고 기다려 겨우 짝을 만났으니 그 애틋한 정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역시 좋은 기회와 인연은 오래 기다려서 얻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