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엽
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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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기(閑 郊 記)

<한교기(閑 郊 記)> 적어도 룸펜 아니고야 일요일도 아닌 오늘 같은 날 집에 붙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어느덧 한 개의 만성 룸펜으로 전락한 나는 이제는 그나마 두어 군데(명색만은 말은 해둔)에서 이제나 저제나 올 듯만 싶던, 아니 꼭 오려니 하고 기다리던 편지조차 기다리기에 진이 날 대로 났다. 절대의 자신이, 요행으로, 요행히 다시 만인게 뽑기로 이렇게 자꾸 내 자신 희망이 엷어가는 한편, 이제는 거리에 나다니기조차 게을러 대개는 두꺼비처럼 어둑한 방 속에 들어박혀 하는 일 없이 천장의 무늬나 헤어보고 묵은 잡지나 뒤적거리며 날이 꾸물거리기만 기다린다.

저녁

<저녁> 소년의 고생을 쓰다고 말게 고진감래 늙어서 낙이 오네. "에여―라 차―" 내 한 몸 고생을 괴롭다 말게 부모와 처자 뉠 바라고 사나. "에여―라 차―" 명철은 천장을 쳐다보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이 소리를 듣고 있다. 멀지 않는 곳에서 집을 짓노라 지정(地釘) 닦는 소리―그것이 지금의 그에겐 퍽이나 구성지게 들린다.

양서방

<양서방> 벼가을도 머지않다. 채마밭 너머로 보이는 넓은 들에는 누런 벼이삭이 황금의 파도를 짓고 끝없이 널려 있다. 벌판 너머로는 황해의 바닷물이 태양을 받아 거울처럼 번쩍거리다. 이따금 우여우여 하고 새 쫓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또 쩌르릉쩌르릉 하고 양철통 흔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서울

<서울> 유기점, 쌀가게, 솜틀각, 정미소, 약방, 여염집, 세탁집, 인쇄소, 구둣방...... . 병호는 어떤 조고만 양복점 진열창 가까이 앉아서 그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범위 안의 이런 것들을 헤어보고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다. 길 위에 떨어진 종이 조각을 먼지와 함께 휘몰아가던 쌀쌀한 여우바람도 이제는 불지 않는다. 거리는 오직 따스한 봄빛 속에 담뿍 젖어 있다. 모든 것이 이 따스한 봄빛에 금시 엿가락처럼 누그러져 녹아내릴 것 같다.

누님

<누님> 나는 40리나 되는 먼 길을 자전거로 달려오면서 대체 집에서 나를 급히 돌아오라는 한 곡절을 알 수 없었다. 첫새벽에 사람을 일부러 자전거로 내보낸 것으로 보아 일이 급한것쯤야 짐작 못 할 것도 아니나 그래도 답답해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을 때마다 심부름 나온 아이는 한사코 "나야 아나요, 하여튼 급히 들어오시라구만 하는 걸요." 이렇게 모호한 대답을 한 뿐이다. 그의 이런 대답이 나의 마음을 덜컥 불안케 하였다.

가물치

<가물치> "아무렴 이제야 운수가 틔나부다" 재봉이는 마을로 뚫린 좁다란 동둑길로 걸어가면서 몇 번이나 혼자 빙그레 웃어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우울증도 이제는 자취를 감춘 것처럼 얼굴엔 기쁨의 빛이 넘실거린다. 발도 한결 가볍게 떼어진다. 그는 또 생각을 한다. '이 일이 제대루만 된다면...... 그렇다, 여편네에게 바가지를 긁힐 필요두없구 그와 싸울 필요두 없다......' 그는 문득 고개를 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