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저택, 푸른 수영장, 시커먼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 그리고 물 위에 시체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는 남자, 고재현. 저 남자가 오늘부터 이혜준이 보호해야 할 의뢰인이었다. 삼엄한 감시 속에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남자. 괴괴한 침묵 속에 갇혀 지내는 남자. 그 침묵이 무섭다고 말하는 남자. 여기에서 그녀의 역할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혜준 씨는 방금 밖에서 본 경호원들로부터 절 경호해 주셔야 해요.” 야생의 강인한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단단한 턱이 벌어지며 수상한 제안을 했다. “제 여자 친구 행세를 하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망설임 없이 건넨 우산.팔뚝에 닿는 뜨뜻한 체온.그 애는 햇살처럼 공평한 친절을 흩뿌리며 다가왔다."너도 내 친군데. 그런데 너한텐 그런 이유 안 통할 거 같아서."온기가 무엇인지 알려 준 그 애는 나를 찾아 온 불행도 가져가 버렸다."사람이 죽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그 애의 손을 놓고 달아난 지 6년.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는 소년은 영영 사라졌다.대신 까만 정장을 입고 나타난 남자가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불편하면 네 말대로 마음의 빚을 갚는 대가라고 생각하든지."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저 남자를 품에 끌어안고 달게 잔 지난밤이 믿기지 않았다."윤재경, 대가 좋아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