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은성
임은성
평균평점 3.75
대척점

착실한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차혜주, 30년 인생의 첫 일탈은 퇴사 후 가장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이국에서 만난 한 남자. 원색의 도시를 배경으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처음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 타앙, 고막이 멀 듯한 총성. 피를 뒤집어쓴 차혜주. 그녀를 끌고 도망치는 남자. “나, 이 방 같이 쓰게 해 줘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이도영의 입가가 근사한 호선을 그렸다. “친구 하자는 건 다 개수작이었어, 혜주야.” 나는 이 남자의 손을 잡아도 될까.

별도 잠든 밤에

녹색 피치 위를 성실하게 뛰어다니던 남자는 하얀 꽃이 움트는 매화나무 아래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5년 전, 나는 남자의 눈부신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짝이던 남자를 추락시킨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이 정도 거리에서 남자를 지켜보고만 싶었다. “교재 같이 봐도 돼요?” 하지만 남자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내가 앉은 책상을 살짝 두드리고, “별거 아니면, 저랑 오늘 같이 점심 먹어요.” 사슴 같은 눈망울로 밥을 먹자고 제안하고, “맛있는 건 다 선배님 주고 싶어요.” 다 아는 것처럼 내 오른쪽에서만 말을 걸고, “우리 집 갈래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허둥거리다가도, “여기는 대흉근, 여기는 복직근, 여기는 대퇴직근.”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새까만 어둠을 뚫고 속삭인다. “선배님은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비인가 접근
3.0 (1)

하얀 저택, 푸른 수영장, 시커먼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 그리고 물 위에 시체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는 남자, 고재현. 저 남자가 오늘부터 이혜준이 보호해야 할 의뢰인이었다. 삼엄한 감시 속에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남자. 괴괴한 침묵 속에 갇혀 지내는 남자. 그 침묵이 무섭다고 말하는 남자. 여기에서 그녀의 역할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혜준 씨는 방금 밖에서 본 경호원들로부터 절 경호해 주셔야 해요.” 야생의 강인한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단단한 턱이 벌어지며 수상한 제안을 했다. “제 여자 친구 행세를 하면서.”

허들

서은규는 문다원에게 열등감이 무엇인지 알려 준 남자였다. 신입 사원 연수 시절, 그녀가 2등에서 아등바등하는 동안 고고하게 1등의 자리를 지킨 입사 동기. 차장 진급 시험에서 그녀가 0.02점 차이로 미끄러졌을 때, 또 한 번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동갑내기.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직속 상사가 되어 소중한 금요일 저녁마저 망쳤다. “다원아, 내가 그렇게 싫어?” “당연히 싫죠, 차장님.” 시선이 직선으로 마주친다. 차가워 보이는 눈매가 5년 전처럼 다시 둥글게 휘어진다. 근사한 목소리가 거짓말 같은 진심을 쏟아 낸다. “나는 네가 좋은데 어쩌지.”

낙원의 한계

본 작품은 리디 웹소설에서 동일한 작품명으로 15세이용가와 19세이용가로 동시 서비스됩니다. 연령가에 따른 일부 장면 및 스토리 전개가 상이할 수 있으니, 연령가를 선택 후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밤 열 시면 어둠에 잠기는 조용한 동네, 하정리. 수십 년 전부터 귀신이 출몰한다던 흉가가 세련된 카페로 탈바꿈했다. 그 카페에서 마주친 기묘한 분위기의 사장은 태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커피 한 잔을 내어 주었다. 그 커피가 문제였을까. 그날 이후로 태은은 가위에 시달리고, 섬뜩함에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어김없이 카페 사장, 지현호와 맞닥뜨리게 된다. “누나, 나 기억나?” 그녀를 괴롭히는 악몽에 등장하는 현호. 기이한 꿈에 마음이 끌리는 태은. 현실에서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들. “요즘 꿈에 자꾸 누나가 나와.” 현호는 태은과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제안한다. “하나씩 시험해 볼래?” “뭐를?” “꿈에서 우리가 한 거, 현실에서도 그대로 따라 해 볼까?” 내리깐 시야에 그의 붉은 입술이 점차 가까워진다.

역전의 순간

성년의 날을 맞이한 약혼녀에게 전달된 선물,기젤라 장미 백 송이와 프랑스의 조향사가 만든 세상에서 하나뿐인 향수.“오빠는 키스를 빼먹었어.”도경은 무감한 얼굴로 서원의 반짝거리는 눈길을 받아 냈다.그래도 그날 그가 서원에게 주었던 것이 그들의 관계에 변곡점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너는 내 약혼녀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서원의 애정 어린 관심을 당연하게 여기는 약혼자.우도경을 쫓아다니는 배서원만 기억하는 사람들.그녀는 잠깐의 일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짙은 네이비색의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약혼자가 풀 파티 한복판에 나타나기 전까지는.“오빠 전화도 안 받고.”도경이 넥타이를 풀며 그린 듯한 미소를 띠었다.“서원아, 재밌게 놀았어?”(15세 이용가)

내가 버린 여름 (외전)
4.5 (1)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망설임 없이 건넨 우산.팔뚝에 닿는 뜨뜻한 체온.그 애는 햇살처럼 공평한 친절을 흩뿌리며 다가왔다."너도 내 친군데. 그런데 너한텐 그런 이유 안 통할 거 같아서."온기가 무엇인지 알려 준 그 애는 나를 찾아 온 불행도 가져가 버렸다."사람이 죽었습니다. 제가…… 죽였습니다."그 애의 손을 놓고 달아난 지 6년.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는 소년은 영영 사라졌다.대신 까만 정장을 입고 나타난 남자가 어떤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손으로 내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불편하면 네 말대로 마음의 빚을 갚는 대가라고 생각하든지."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저 남자를 품에 끌어안고 달게 잔 지난밤이 믿기지 않았다."윤재경, 대가 좋아하잖아."

별도 잠든 밤에 특별 외전

녹색 피치 위를 성실하게 뛰어다니던 남자는하얀 꽃이 움트는 매화나무 아래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5년 전, 나는 남자의 눈부신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렇게 반짝이던 남자를 추락시킨 사람은 나였다.그래서 이 정도 거리에서 남자를 지켜보고만 싶었다.“교재 같이 봐도 돼요?”하지만 남자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내가 앉은 책상을 살짝 두드리고,“별거 아니면, 저랑 오늘 같이 점심 먹어요.”사슴 같은 눈망울로 밥을 먹자고 제안하고,“맛있는 건 다 선배님 주고 싶어요.”다 아는 것처럼 내 오른쪽에서만 말을 걸고,“우리 집 갈래요?”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허둥거리다가도,“여기는 대흉근, 여기는 복직근, 여기는 대퇴직근.”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새까만 어둠을 뚫고 속삭인다.“선배님은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대척점 특별 외전2

착실한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차혜주,30년 인생의 첫 일탈은 퇴사 후 가장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그렇게 도착한 이국에서 만난 한 남자.원색의 도시를 배경으로,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처음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다.타앙, 고막이 멀 듯한 총성.피를 뒤집어쓴 차혜주.그녀를 끌고 도망치는 남자.“나, 이 방 같이 쓰게 해 줘요.”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이도영의 입가가 근사한 호선을 그렸다.“친구 하자는 건 다 개수작이었어, 혜주야.”나는 이 남자의 손을 잡아도 될까.

겨울의 불청객

군사 분계선 가까이 있는 설산,나무들의 그늘 사이에 숨은 거대한 저택,그곳에 퀵 배달을 간 여은은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시체를 끌고 나오는 남자, 차태희와 마주친다.“하룻밤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시는 게 어떠세요?”눈 쌓인 비탈을 무리하게 내려가던 여은은 다리를 다치고 설상가상으로 오토바이까지 잃어버리고 만다.“내가 조심히 가라고 했잖아요.”다친 배달원을 직접 치료해 주는,열이 높다고 새벽 내내 침대 곁을 지키는,욕실에 데려다주고 밥을 챙겨 주는 남자.살인범에게 끌리는 모순적인 마음을 빈약한 이유로 가리곤, 저택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거짓 증언까지 하게 되는 여은.“지루하지 않게 해 줄까요?”선악과를 먹어 보라고 유혹하는 뱀을 닮은 목소리에 홀린 것도 잠시.여은은 저택 뒤편의 창고에서 보아서는 안 될 광경을 맞닥뜨리고 마는데…….“여은 씨는 내가 강우현을 죽였다고 생각해요?”

안개가 부서지는 날

그러니까 그건 자제할 수 있는 종류의 감탄이 아니었다. “와씨…….” 느닷없이 무산에 나타난 여자는 미치게 예뻤다. 너무 예뻐서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다 꼬였다. 김새얀에게 추태를 부리던 취객을 붙잡아 그 새끼의 머리통을 뚝배기로 후려쳤을 때, 주오의 머릿속에는 선명한 감상 하나가 피어올랐다. 망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주오에게 먼저 다가온 건 새얀이었다. 여자 친구가 없으면 나랑 밥을 먹으러 가자고. 주오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너무 좋아서 매일같이 새얀의 보디가드를 자청하며 졸래졸래 쫓아다녔다. “남주오, 내 기둥서방 할래?” 그러나 주오가 기다렸던 건 그런 제안이 아니었다. 맛있는 걸 사 주고, 좋은 차로 모시고 다니고, 찝쩍대는 아저씨들에게 적당히 겁도 주고. 그 대가로 기둥서방 따위의 자리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나 그냥 남자 친구 하면 안 돼?”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를 보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고집스럽게 호수만 바라보던 새얀이 천천히 돌아서 주오를 마주 보았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 사귀자고 고백한 남자에게, 여자는 자신이 살인자라고 고백했다.

빗장 밖의 해일

서울의 가장 비싼 땅에 별채까지 따로 지은 대저택이나, 사채 빚만 수억을 진 시골집이나 지저분한 사연을 품은 건 매한가지다. “귓구멍 막혔어? 무릎 굽히고 따라와.” 시한부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만큼 성질머리 한번 끝내주는 환자. “우리 형이 무섭게 굴면 여기로 도망쳐요.” 예쁘게 웃는 얼굴로 사람의 기를 쏙쏙 빼 가는 고용주. “밤에는 못 나가.” “왜요?” “문이 잠겼으니까.” 매일 해가 저물면 바깥에서 문이 잠기는 별채의 비밀까지. 사채업자들을 피해 이 저택을 도피처로 삼은 건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여기서 무사히 1년을 보내면 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일러스트: 재득

세 번째 안녕

“은호가 죽었어.” 빗줄기가 사납게 들이치는 날이었다. 7년을 만난 남자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이 장맛비와 함께 찾아왔다. “덤프트럭 하나가 서양양IC에서부터 백은호 씨의 차를 쫓아왔습니다.” 경찰은 남자 친구가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얘기했고. “나는 너희들이 결혼까지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쉽게 끝나서 어떡하냐.” 그의 장례식장에 온 유력한 용의자는 비극적인 결말을 조롱했다. 이대로 장례식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 좋겠다. 나는 이 끔찍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냥 너를 따라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름에서 봄으로 시간을 되돌아온 걸 깨달았을 때,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건 건강하게 살아 있는 백은호 하나뿐이었다. “은호야.”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앞머리, 세필로 그린 듯한 눈매와 그 아래 자리한 눈물점, 어깻죽지가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티셔츠. 모두 그대로였다. “누구?” 하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시리도록 무감정했고, 그래서 또 지나치게 낯설었다. 나는 정말 시간을 되돌아왔을까. 아니면 악몽 속의 악몽에 갇힌 걸까.

징크스 투 징크스

[최시문에게 쏟아진 혹평 … 천재 수비수의 추락]역대 한국 선수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최시문.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오래가지 못한다.결국 부진에 시달리던 데뷔 2년 차, 그는 온갖 조롱을 들으며 한국의 꼴찌 팀으로 임대된다.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시문이 굳이 맨 아래에 처박힌 팀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 본가와 가까워서.그리고 구태여 본가에서 출퇴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남몰래 좋아했던 옆집 여자애, 윤슬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서.“우윤슬, 아직도 최원경 좋아하냐.”하지만 윤슬은 그의 쌍둥이 형제를 몇 년째 짝사랑하고 있고, 무뚝뚝한 입술은 이 애 앞에서 매번 고장이 난다.“우윤슬, 고기 사 줄까.”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윤슬이 울 때 맛있는 음식으로 달래주는 것뿐.그러던 어느 날, 윤슬이 시문의 가슴팍에 붙은 수박씨를 떼어 주고, 운명의 장난처럼 그는 올해 들어 최고의 활약을 펼치게 된다.징크스는 징크스를 불러온다.믿지 않는 선수에겐 미신에 불과하지만, 한번 의식한 순간, 그건 그림자가 되어 경기마다 따라붙는다.그래서 시문은 윤슬에게 간절하게 부탁한다.“여기 좀 만져 주면 안 되냐.”앞으로 우윤슬의 모든 게 그의 징크스가 될 줄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