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이었잖아, 우리 관계. 아,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무도한 편지 한 장만을 두고 떠난 이멜린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보란 듯 전한 그녀의 약혼 소식을 듣고서. *** 시작은 가문 간의 견제로 인한 앙숙 사이. 그 남자, 제넌 트랑시움은 매일같이 그녀의 자존심을 긁어 대는 귀족층의 불량아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두 사람이 아직 어리고 미숙했을 때. “키스는 해 봤어? 아, 너무 고귀하신 존재라 누가 닿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켰지?” “나도 해 본 적 있어. 보여 줘?” 일방적인 도발로 시작된 자존심 싸움이 첫사랑으로 자리해 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끝이 남자의 장난이었단 걸 깨닫고, 이멜린은 그를 지웠다. 아니, 그러려 했다. “오랜만이야, 델제어 양.” 이멜린의 약혼 소식을 접한 그가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진. “내가 죽을 만큼 싫어? 근데 나는 왜 그게 거짓말 같지.” 그녀를 버린 주제에 먼저 버림받은 눈빛을 하는 남자. 그녀의 첫사랑이 다시금 이멜린의 삶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전엔 멋대로 사랑을 주더니, 이번엔 멋대로 그녀의 약혼을 훼방 놓는 것으로. “델제어 양, 우린 여전히 가문을 낀 앙숙이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둘게.” 우린 더 이상 그 여름날의 어린애가 아니라는 거.
제국의 상업계를 틀어쥔 거상, 이딜로스 록센 카델라로트 공작. 그가 짐승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하필 새끼 고양이인 나를 주운 것이 공작의 여동생이었고, 또 하필 나를 숨기다가 들켰다. 이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가 해맑게 애교를 부렸는데……. “으……!” 으? 이딜로스가 다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굳었다. ……방금 날 보고 소리 지르려 한 거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인간은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였단 걸! * * * 깍지를 끼며 내 손을 단단히 옭아맨 그가 말했다. “날 잡아먹고 싶다고 했잖아.”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건 다 장난…….” “장난? 그때 내가 무서워서 잠도 못 이뤘는데……, 장난이라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짙은 눈빛에 희미한 원망이 내비쳤다. 나는 저 불쌍한 척하는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윽고, 내 예상대로 눈빛을 뒤바꾼 그가 감히 눈앞의 맹수를 먹이처럼 두고 유유히 웃었다. “책임져.” “…….” “너라면 잡아먹혀 줄게.” ……그냥 나를 싫어하지 않게 만들려던 것뿐인데. 이 인간, 겁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