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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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기우는 너의 밤을 위하여

피화루. 수혁은 율혜의 행색을 다시 훑었다. 글쎄, 기생이라고 하기에는 차림부터 모자람이 다분했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애기 기생쯤 되려나. 그러기엔 나이가 찬 것 같고. 언행 또한, 여느 기생과 같지 않고.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터라, 무릎이 접히면서 몸이 휘청였다. 수혁이 커다란 손을 뻗어 율혜의 팔을 낚아채 잡았다. 율혜는 제 몸을 휘어 감는 열기에 놀라,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쳤다. 수혁이 비어 버린 제 손을 꾹, 말아쥐며 물었다. “내 수고로움도 피화루로 가서 보상을 받으면 되겠느냐.” 보호해야 할 아이가 없는 이상, 율혜는 이제 수혁의 눈이 두렵지 않았다. 제 다홍치마에 묻은 진흙을 툭툭, 털어 내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기루라고 해서 기생만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하여?” “나으리께서 원하시는 보상은, 제가 해 드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수혁이 픽, 가볍게 웃었다. 고작 아이 하나 지킬 때는 온 세상을 다 바꾸어 줄 것처럼 절절 기더니, 지금에 와서는 이리 당당하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눈앞에서 그 아이의 손목 하나 정도는 비틀어 줄 걸 그랬지. 그럼 이 눈에 눈물이라도 맺혀 뚝뚝 흐르는 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천한 기생년 주제에 고작 아이 하나 지켜 놓고, 온 세상 가련한 것들의 비호를 맡은 것처럼 당당한 검은 눈을 보자니 수혁의 심사가 뒤틀렸다.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았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 윤, 당신의 뜻입니까. 당신이 기어코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였습니까. 수혁이 짧은 한숨 끝에 뒤로 돌았다. 참으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계집이었다.

나의 숨결에, 서려

“네가 가진 찰나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 나는 나의 생을 던진다.” 신의 저주를 받은 아이가 태어났다.  처절하게 살아남은 아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려’라고 불렀다. 서려가 가진 것은 모조리 빼앗기고 부수어졌다. 살아서 숨을 머금는 것으로도 운명에 늘 미움을 받았다.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도 노여운 신의 저주를 풀 수 없다면……. 이번 생을 바쳐서 운명의 눈을 가려보기로 한다. 해서,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을 찾는다. “적어도 세상 하나쯤은 손쉽게 부수어 버릴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신.  마음 하나쯤은 그 손에 쥐고 깨뜨려 버릴 수 있는, 나의 오만한 신. 당신께 빌고, 또 빌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구하는 신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는 귀신이 되어 주세요.”

애착흔

“반야. 너는 나를 구원하는 전부이자, 나를 절망시키는 일부이다.” 해월국과 적하국의 국경 사이, 작은 마을 '천더기'의 반야. 그녀는 두 민족의 피가 섞인 ‘잡종’으로 모멸 받아도 씩씩하게만 살아왔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아버지마저 잃기 전까지는. 여전히 다정한 ‘언우’라는 사내의 손을 잡고서야 알게 된다.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의 원수는 해월국의 대장군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대장군은 언우 나으리의 아비라는 것도. 반야는 가족의 원수가 된 해월국을 증오하기로 결심하고 복수의 칼날을 다듬는다. 그리고 적하국의 황제인 카리얀을 찾아가는데. “그래, 너는 마음도 몸도, 그리고 너의 운명마저도 그 사내에게 주고 왔구나.” 두 남자의 욕망 사이에서,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독화의 꽃말은 영원이어서

“목이 마르다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독에 입술을 대는 계집이 또 있을까.”건륭국의 세자 이립.“건륭국으로 가야 하는 이가 왜 저입니까.”그런 그가 임금의 일곱 번째 후궁으로 택한 자호안국의 공주, 여로.“세자께서는 아주 고귀하여서 아비의 중매 노릇을 다 하시는군요.부부가 합방하는 잠자리까지 살펴 주시지 그러십니까?”지옥 같은 상황에 놓인 여로는 살아남기 위해부러 더 독기를 품은 채 이립에게 응수하고.“나쁘지 않군. 고려해 보지.”그녀의 건방진 태도에 줄곧 냉담하던 이립은어느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하는데.“왜? 임금의 후궁을 세자인 내가 탐했다는 소문이라도 돌까 봐?”“무, 무슨 그런 말을……!”“그게 걱정이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 * *“곤란한데.”어디선가 갑자기 낮고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헉, 숨을 먹은 여로는 풀어 내리려던 매듭을 급하게 다시 여몄다.“아, 곤란한 건 이제 내가 아닌가?”부드럽게 웃는 이립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