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연예계로 뛰어든, 아직 신인 배우 타이틀을 떼지도 못한 여자, 윤서희. 평생 기대와 책임을 어깨에 이고 후계자로서 살아온, 기업을 잇는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남자, 이교현. 운명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결혼하고 정확히 1년이 되기 하루 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생각 못 하는 서희에게 교현은 지루하고 귀찮은 일을 처리하듯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내일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여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렇더군.” 그는 따분한 투로 말했다. “그 정도면 살 만큼 살았다 싶어서.” 표지 일러스트: 푸디카 삽화 일러스트: 한종원
“안 지킬 사람들이니까 그런 걸 1번에 놓죠.내적으로 갈등이 있으니까 그것부터 생각나는 거예요.반면에 우리? 설거지가 더 중요하죠.”분명히 설거지가 더 중요한 담백한 사이였다.“우리 개가 될 만큼은 마시지 맙시다. 마시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드니까.뭐, 밖에서 마시고 들어오는 것까지야 뭐라고 안 해도.”개가 될 만큼 마신 것도 아니었다. 평소라면 취하지도 않았을 맥주 네다섯 캔.고작 그 정도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아니다, 술은 죄가 없다.아무 느낌 없다면서 의도 없이 홀리는 후배놈이 문제였다.술기운을 빌려 오랜 짝사랑에 용기를 내버린 과감함이 문제였다.아니, 곱상하게 생긴 낭창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파고든 게 문제였을까.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쿨한 척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120만 원에 눈이 머는 게 아니었는데.그냥 정리해고 대상인 짝사랑의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선후배 사이로 지냈어야 했는데.4년차 짝사랑 경력직인 서정의 집으로 쳐들어온시건방진 후배 여경과의 달콤 짭짤하고 새콤 씁쓸한 동거가 시작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의 경멸 어린 싸늘한 시선이 떠오른다. 직장 동료 아버지와 원조교제 하는 여자.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대단한 사이였던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달 남짓, 썸 좀 타던 사이. 어차피 잘 되지도 않았을, 잘 되어봐야 몇 달 연애하다 헤어졌을 딱 그 정도의 사이인데 이 남자가 뭐라고 치부까지 드러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다 아는데… 왜 맥주 몇 잔에 이다지도 기분이 처지는 걸까.“당신이 궁금해요.”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여자한테 이렇게 목매는 것도 처음인데, 그런 추잡한 늙은이에게 몸 파는 여자였다니. 사정이 있을 거라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안 된다. 이 여자,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 재주가 탁월한가 보다. 겉만 멀쩡한 쓰레기 같은 여자였다고, 그렇게 정리해 버리면 될 텐데 쉽지가 않다. 고도의 연기인지, 아니면 숨겨진 진심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불행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이름을 버리고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난 이헌과파도처럼 밀려오는 난관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희수.고등학교 시절, 엉망진창이었던 마지막으로부터 9년.두 사람은 그때의 그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모습으로 재회한다.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시, 희수는 연기에 휩싸인 차 안에서 정신을 잃은 이헌을 발견하는데….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이헌은 여유롭지도 않은 형편에그런 자신을 집으로 데려온 희수를 잠시 의심하지만,당신 나 좋아하잖아. 아냐?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기억이 없는 거지, 바보가 된 게 아니라니까.들뜬 목소리와 시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떠오르는 실없는 웃음에는이헌을 향한 희수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거듭 덮쳐온 불행에 익숙해져버린 희수와 이헌.가난한 마음에도 피어오르는 이 감정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어떻게 할까, 희수야. 다 그만둘까?…그만두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