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이나 파는 싸구려인 줄 알았어요?” 하룻밤의 착각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혜원은 함께 밤을 보낸 남자이자 갑자기 제 상사가 된 태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한테 먼저 키스하신 건 부사장님이세요.” “아, 그래서…… 나를 먹고 튄 건 잘못이 없다?”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반박했지만, 돌아오는 건 저를 죄 흔드는 말들뿐이었다. 그래서 무시하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그에게 자꾸 치부를 들키게 되었다. “윤혜원 씨한테 애인 노릇 해줄 수 있어요.” 혜원의 연약한 부분을 알게 된 그는 장난스러운 제안을 했다. “원하면 직접 깽판도 쳐주고.” 그의 사악한 미소를 보자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피해 다니는 건 아는데, 그렇게 티를 내니까…….” “…….” “내 기분이 별로네요?” 내가 혜주 씨를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잖아요? 혜주의 상사, 고건우는 느른하게 말했다. 하지만 혜주로서는 그를 피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저를 흔들었으니까. “대표님과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지. 그건 좀 어렵겠는데, 혜주 씨.” 그 말과 함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혜주 씨도 분명 낯선데 이상하게 익숙한 꿈을 꾸고…….” “…….”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 거야, 그렇죠?” 혜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를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익숙한 꿈을 꾸거나 환영에 시달렸으니까. 마치, 예전에 그와 어떤 관계라도 되었던 것처럼……. 그가 저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기억 못 하더라도, 내가 기억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는 이게 기억이라고 말했다. 꿈이나 환영 따위가 아니라.
※본 소설에는 자해, 자살 시도 등의 키워드가 포함돼 있습니다. ※본 작품은 리디 웹소설에서 동일한 작품명으로 19세이용가와 15세이용가로 동시 서비스됩니다. 연령가에 따른 일부 장면 및 스토리 전개가 상이할 수 있으니, 연령가를 선택 후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자연의 이치처럼 찾아온 봄을 거부할 수 없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여린 새싹은 그 남자가 던져 주는 눈빛과 말 한마디를 자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랐다. 서은기는 장대권을 살리기 위한 도구인 걸 몰랐다. 응당 인간 부적으로, 액운받이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각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본인이 흘리고 다닌다는 걸?”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흘리고 다닌다, 달리 고상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더 큰 문제네요. 본인이 그런 줄도 모르고 싸게 군다는 말이니.” 말로에는 쓰임을 다하면 버려질 패였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됐다. * * * 그는 모호한 것을 질색하는 편이었지만, 서은기를 대할 때는 모든 것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좋아해요.’ 그 애가 말한 ‘좋아하는 것’은 엄마, 아빠, 케이크 등 수많은 것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말에 그가 이룩한 경계가 무뎌지고, 그어 놓은 선이 망가지는 기분을 느꼈다. 옆에 두고 보고 있으면 기껍고, 보지 않으면 어색하고. 그 애의 입술로 말한 그 몇 음절을 다시 들어 보고 싶고. “재밌네….” 그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야 비로소 그 찰나를 곱씹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서은기 따위가 뭐라고. 병신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