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나는 한 달 전, 자신이 소설 속에 빙의한 것을 깨달았다. 원작의 남주는 자신의 남편인 페이론 이올스였고, 에리나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빛내기 위해 만들어진 악녀였다. 에리나는 원작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이 여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앞으로 계속 이 저택에 머물 거야.” 하지만 막상 눈앞에 두 사람의 모습을 마주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로즈가 가질 모든 것을 빼앗고 페이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더러운 불륜을 사랑으로 포장해 에리나를 망가뜨리고 악녀로 만들려는 두 사람을, 에리나를 가두고 시들게 만들려는 이올스를 모두 망가뜨릴 것이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이기적인 악녀가 되어 당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운명을 만났다는 확신에 둘러싸고 있는 모략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랑이라 믿은 모든 것들에게 배신당했다. 다시 주어진 삶에서는 먼저 그들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무례하시네요, 펠튼 자작님.” “더 이상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어요, 메들린 백작님.” “네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 다 허상이라는 걸 알려 줄게.” 그렇게 복수를 마무리하고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보호하려면 제 곁에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혼인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제 곁엔 의무감으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은밀하게 접근한 이가 속삭였다. “당신이 가진 그걸 내게 바쳐. 그럼 너에게 고귀한 신분을 약속하지.” 모든 것을 잔인하게 짓밟고 서고 싶은 이를 만난 순간, 베로니카는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온 이유를.
결혼 첫날밤 광기에 휩싸인 남주의 손에 죽는 한 줄짜리 조연에 빙의했다. 눈을 뜨자마자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원치 않게 죽어 빙의한 것도 억울한데 이대로 또다시 죽기는 싫었다. 그래서 달리아는 원작 여주 대신 제가 남주의 광기를 진정시켜 줄 마족을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달리아. 이름도 달콤한 내 주인.” 원작 여주가 소환했다던 토끼 같은 마족은 어디 가고 아름다운 남자가 제 발등에 키스하고 있었다. “아니,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정체는 원작 남주이자 오늘 막 나의 남편이 된 엔들린 공작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사랑스러운 주인이 부인이었어?” 피폐물 주인공답게 차갑고 냉혈한 바론 엔들린은 어디 가고 결혼했다는 사실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며 환하게 웃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