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는 아버지의 회사를 지키기 위해 하준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거기엔 사실 말하지 못한 사랑도 있었다. 하준은 무슨 생각인지 막무가내인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는 시어머니의 모진 시집살이를 견뎌내던 중 소이는 임신을 했고, 이때 하준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남편에게 임신했음을 알리기도 전에 소이는 찾아온 아이를 잃게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소이는 하준이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요구한다. 결혼 1년 만이었다. 3년 후.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던 꽃집을 운영하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 있던 소이는 또다시 아버지 회사의 경영 위기로 이번엔 모든 것을 잃을 상황에 처하고 만다. 다른 건 다 잃어도 어머니의 흔적만은 잃을 수 없다고 다짐한 소이는 3년 만에, 전남편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3년 만에 찾아와 염치없이 도움을 청하는 그녀에게 하준은 거래를 제시한다. 재결합, 아니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 서하준(30대) 완벽주의자 냉혈한. 국내 재계서열 3위 KU그룹의 장남. 소이와 결혼했으나, 결혼생활 1년, 그리고 이혼도 모두 그녀의 뜻대로였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와 도와달라는 그녀를 또 한 번 곁에 두기로 한다. 민소이(30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선택한 하준과의 결혼은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하준을 사랑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고된 시집살이를 버티던 그녀를 절망케 한 건 유산이었다. 이혼 후, 3년. 또 다시 전남편을 찾아가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또다시 도망칠 생각이라면, 내 애는 놓고 가.” 꼬박 5년 만의 재회는 차가웠다. 한없이 깊은 그의 눈동자에 다정한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묻지, 그 남자의 애를 만든 게 나와 이혼하기 전이 확실한 건가.” 차게 비틀린 입매를 본 순간, 수호에게 행복한 삶을 주리라는 일념뿐이었던 날이 떠올랐다.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야 할 거야.” 용서받지 못할 상처를 안긴 대가로 증오와 원망에 휩싸인 그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내 의심을 피하려면.” 아린은 성난 손아귀에 낚아채인 팔을 힘껏 뿌리쳐 내며 앙칼진 음성을 토해 냈다. “그래요, 당신 아이 맞아요!” 천륜이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님을 유독 그를 따르는 수호를 보며 깨달았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어요.” 결국, 정면 돌파를 감행한 아린은 집요하리만치 오롯한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마저 포기했다. “돌아갈 생각이었으면 도망치지도 않았어요.” 근본 없는 하찮은 처지임이 변치 않는 것처럼, 수호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도 변함이 없으니까. 그리움에 사무쳐 매일 밤, 부르짖던 그를 또 한 번 등져야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다신 찾아오지 말아요!” 이번에도 제 감정 따위는 가차 없이 갈무리하며 서둘러 돌아서던 그때, 시선을 가로막아 세운 그의 팔에 맥없이 허리가 채였다.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강압적으로 울리는 사이, 조소를 머금고 뒤틀린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이번 선택권을 가진 건, 나야.”
“내 생각은 많이 했고?” 다난했던 6년 만에 쾌거를 이루는 날이었다. 꿈의 기업이었던 ‘벨레자퍼시픽’에 지원하기를 3년 만의 입사였다. 그런데 본부장이자 명예회장의 유일한 손자라는 풍문 속 인물이 거지발싸개 같은 소리를 계속한다. “난 무척 많이 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상당히 거슬렸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하물며 생사조차 불분명했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보내왔다. “아직도 우리 과거는 기억 안 나는 거지?” 14년을 친구로만 지내왔던 남사친 진현우. ‘너 오늘부터 내 여자 된 거다.’ 온갖 달콤한 속삭임으로 저를 가진 첫 남자. 눈뜨고 나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흔적만 남겨두고 사라져 버린 천하의 나쁜 놈. “나한테 여자는 서나예 하나라는 게 중요하지. 6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예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차라리 그 짓을 벌인 게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해주면 이렇게까지 괘씸하진 않았을 텐데. “남자는 좀 만났어?” 눈시울이 따가워진 것이 느껴진 나예가 고개를 획 돌렸다. 울지 않을 건데, 울면 안 되는데.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하니까.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못 만났나.” 미친놈. 육성으로 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억눌러 참아냈다. 언젠가 폭발해버리는 날이 오거든 넌 그날이 제삿날이야. “난 그날 밤을 자주 떠올리는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나예의 두 뺨에 짙은 홍조가 내려앉았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 또, 오만 요사스러운 소리들을 늘어놓는구나. “벌써부터 설레고 기대되네.” 이렇게 되면 6년 전과 다를 게 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자꾸만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로 버금갈 만한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비주얼이 여전한 탓일까. “근데 그거 압니까, 서나예 씨.” 간도 쓸개도 없는 보잘것없는 여자이고 싶은 거니. 정신 차려. 떨리지도 말고 설레지도 말란 말이야.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