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의 대가는 내가 해민정밀에 앞으로 충분히 보답할 겁니다.” 해민정밀. 고작 해봐야 작은 규모의 공장. 정선 그룹이 거래를 끊으면 부도가 날 수도 있는 힘없는 협력업체.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제로 진행된 결혼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의 연인을 다른 사람으로 오해해도, 아니라고 밖으로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것. 둘이서 합의한 결혼이 아니기에 그의 애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다 감내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 성헌과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 “해연아.” 느닷없이 팔을 파고들어 손을 감싸 쥐는 촉감에, 무언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해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혼계약서를 쓰고 이렇게 지내온지가 벌써 3년. 결혼 후,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다정한 호칭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톤이었다. “네 발로 걸어갈래. 아니면 끌려갈래.”
‘야이 박복한 년아!’ 구름 한 점 없는 쨍쨍한 여름 날씨, 외할머니의 불길한 목소리가 유독 쟁쟁 울리던 어느 날. 가진 복 하나 없이, 도화살만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고미는 제가 일하는 태산 그룹 저택, ‘청운재’의 마당에서 끈적끈적한 검은 타르 같은 남자를 만난다. 바로 태산 그룹의 차손, 장태건을. 자신의 이복형을 구치소에 처넣은 남자. 약혼녀를 몇 명이나 갈아치운 남자. 조카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는 남자. “구면이네요, 우리.” 그를 가리키는 말도 안 되는 수식어들이 고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 “입술은 닦고 나가. 잔뜩 젖었으니까.” 이런 건 부적절했다. 부도덕했다. “저를 오해하고 계셨잖아요. 내연 관계라고.” “이복형 구치소에 갖다 박은 사람에게 무슨 도덕성을 바라고 그래요.” 남자가 질 낮게 웃었다. 전례 없던 재앙이 고미에게 떨어져 버렸다. 한순간의 욕심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출생부터 타고난 이 박복함은, 역시나 고미를 배신하지 않았다. 감당 못 할 무언가가 밀려들어 한없이 울렁거렸다. 이 감정의 이름을 안다. 비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