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약에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돌아온다면, 네 어미를 자유롭게 해주 마. 그리고 네 동생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돈도 주고.” “정말, 정말로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거죠?” 리시아는 후작이 건네는 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건 그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고 이 길고 긴 지옥 같은 삶을 끝낼 유일한 길이었다. 황궁이 어떤 곳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 어디라도 지옥 같은 후작저 보다는 나을 테니. 그리고 아티커스를 만났다. “다음에 내가 보고 싶으면 그냥 찾아와요. 괜찮으니까.” 그녀가 꼭꼭 눌러 단단히 잠가둔 마음의 빗장을, 너무도 쉽게 열고 들어서는 그를. “나의 비가 되어줘요.” “나중에 혹시 저에게 실망하시게 되어도, 원망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는 방법이, 그때는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으니까. 그를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그녀도 몰랐으니까. 어리석다 욕해도 원망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뻑뻑했던 눈가가 촉촉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리시아는 울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입 안을 짓씹었다. 가슴에 그를 죽일 칼을 품은 주제에 그녀는 울 자격이 없었다. “리시아도 약속해줘요. 어떤 끝이 오더라도 원망하지 않기로.” 리시아는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찬 동시에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한 번이라도 서보고 싶다는 욕심. 신이여, 제발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로페리니 백작 가의 다섯째 에스테르. 아버지의 죄를 덮기 위해 궁에 볼모로 들어가게 된다. 허울뿐인 후궁으로 궁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갑작스레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가족들로부터 외면받고 그 모든 것을 견뎠어도 돌아오는 것이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삶에 작은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 다행이라고 느꼈던 순간, 17살로 돌아오게 된다. 원하지 않는 회귀가 어째서, 누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에스테르는 손을 뻗어 히아신스 꽃잎을 손끝으로 살포시 더듬었다.기억 속 가장 끔찍했던 곳에서 가장 평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 때쯤 그녀의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에스테르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를 올려다보자 파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꼭 에스테르처럼 예쁜 꽃이네요.”그가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이렇게 모든 것을 잊고 새 삶을 살아도 되는 걸까.“그냥, 이제는 더 얽힐 일이 이제 없겠다 싶어서요.”“그래야죠, 그러려고 오래 준비한 일인데요.”그의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그러고 보니, 왜 회귀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정말 한 번도 없을까.
[잿빛 늑대의 고귀한 핏줄과 붉은 용의 결합 없이는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을지니.] 오틸리에에 내려진 신탁. 백 년 전 신탁을 거부한 대가로 몰락할 뻔했던 오틸리에 제국은 이 신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황제의 사촌이 죽은 일로 곤경에 빠졌던 체노스는 신탁을 받아들이고 크리스티안과 아리앤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만큼은 뜻대로 하고 싶었던 크리스티안에게 이 결혼은 정말이지 재앙이었다. 아리앤을 보면 가슴이 간질거려도, 기분이 이상하게 답답해져도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저 무시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를 보는 눈동자에 열의가 사라지고 애정이 옅어졌다. “언제, 어디서라도 너는 날 피하면 안 돼. 억지라도 받아들여.” 그는 오만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을 줄 알았다. 아리앤을 얼마나 무시하고 짓밟고 상처 주더라도 그녀는 그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크리스티안은 아리앤을 외면했다. 적어도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죽지 않았다고 했잖아. 아리앤은 죽지 않았다고!” 마차 사고와 함께 아리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아리앤을 다시 찾게 된다. 기억을 모조리 잃은 그녀를. 이건 기회였다.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 아리앤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갔다. 그가 아무리 그녀를 매몰차게 외면해도 언젠가는 저를 봐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냉대와 남편의 무시, 사람들의 멸시였다. 그녀는 사랑에 지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만나 처음 깨달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기억을 다 잃어버린 그녀.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잔상 속 남편과 눈앞에 있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도 다른 이유는 뭘까. 도무지 맞춰지지 않는 이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리고 그녀는 결국 깨닫게 된다. 그 사고는 신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배려였음을.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없어. 온하늘. 일찍 부모님을 돌아가시고 그녀의 하늘은 언제나 회색이었다. 말갛게 비추는 태양 같은 태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외롭던 하늘에게 태오는 반짝이고 찬란한 햇빛과 같았다. 그래서였다. 파란 하늘같이 맑은 서태오에게 제 우중충한 그늘을 덮어씌우고 싶지 않아서 떠났다. 그리고 4년 후. 태오의 조카인 지유의 담임으로 재회하게 된 두 사람. 여전히 거리를 두는 하늘과는 다르게 태오는 거침없이 그녀에게로 다가서는데. “사람을 그렇게 가지고 놀았으면 응당 맞는 대가를 치러야지. 이 정도면 완전히 거저먹고 들어가는 건데. 내가 너무 착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