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들이 여주에게 집착하는 피폐 아카데미물에 빙의했다. 적당한 마법 재능도 타고 났겠다, 나는 아카데미 생활을 조용하고 무난하게 끝낼 예정이었다. 누가 막장 소설 아니랄까 봐 기를 쓰고 피해 다니려 해도 온갖 이벤트가 발생해 자꾸 내게 들러붙는 남주들만 아니었다면.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신선하군." "미친놈." 조별 과제를 땡땡이쳐서 걷어찼더니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를 시전 하는 능글맞은 황자, 칼릭스부터. "넌 왜 나를 두려워하지?"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묻어 버릴 텐데 그럼 안 무섭겠냐.' 다정하고 상냥한 척 하지만 실제론 차갑고 냉정한 성격에 인성도 반 바퀴 돌아버린 미래의 마탑주, 이안. "빵, 더 만들어 줄까?” “……응.” 무뚝뚝하고 듬직한 게 요리도 잘해서 그나마 마음에 들지만 얘도 결국엔 집착남이 될 운명이다. 아, 이름은 레오. 쉴 새 없이 빵빵 터지는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 사이, 정신 차려 보니 남주들과 전부 친해졌다. 그래, 남주들과 친구가 되면 또 어떻겠나. 나는 결국 원작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로 했다. 물론, 미친 남주들의 나를 향한 본격적인 집착은 덤이다.
"왜 날 돕는 거지?" "네가 날 죽여줬으면 해서." 원작 여주의 친구 역할로 빙의한 벨로나는 현재 회귀만 21번 반복하는 중이었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은 벨로나를 지치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기로 했다. 반복되는 회귀 동안 자신을 몇 번이나 죽였으며, 이미 반쯤 미쳐 있는 원작 최대 악역, 데미닉을 돕기로. "난 네가 끝까지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네가 온전히 승리하는 미래야말로 내겐 영원한 안식일지도 모르니. *** 하지만 벨로나는, 그녀의 구원이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나를 사랑하지 마, 데미닉. 나는 네 사랑을 되돌려줄 수 없어." "그럼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너를 항상 사랑할게. 절대 너를 잊지 않을게." 데미닉은 회귀하게 되면 모든 기억을 잃는다. 지금까지 그랬듯 몇 번이고. 벨로나는 그런 그와 사랑에 빠졌다가 또다시 되돌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데미닉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너와 함께하는 이 삶이 가장 찬란한 마지막 삶이었으면 좋겠어, 벨로나." "바보야, 넌 네가 하는 말의 무게를 몰라." 그럼에도 이 지옥같은 회귀의 늪에 함께 뛰어들겠다는 절절한 고백은 벨로나가 그 어느 때보다 삶에 미련을 갖게 만들었다. "내가, 꼭 그렇게 되게 만들 거야." 오롯이 자신만을 눈에 담는 데미닉을 바라보며 벨로나는 자신도 이미 그와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