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은 최대한 빨리 올릴 예정입니다.” 남자와는 딱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첫 번째는 우연히, 두 번째는 상견례 자리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그와 결혼식을 올리며. 권태주. 이름 세 글자만 겨우 아는 남자였다.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튀어나오려는 진실을 꿀꺽 삼켰다. 눈앞의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눈 뜨고 걸어 들어가는 지옥 길보다는, 지옥일지 천국일지 모르는 이 남자의 옆이 낫겠지 싶어서. 그래서 결혼식을 올린 날, 그에게 이혼을 전제로 한 결혼생활을 요구했다. 그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도 모르고. * 첫 만남 때부터 이상했던 남자. 집에는 오지도 않고, 내킬 때나 찾아오겠다며 방치하던 남자. 그래, 분명 꼴도 보기 싫은데.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걸리적거린다. 스치듯 저를 만질 때의 뜨거운 손길이나, 바라보는 눈길 때문일까. 아니면 가끔 애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 때문일까. 냉한 얼굴에서 간혹 느껴지는 애틋함이라니. 모순적인 감정의 충돌 속 의구심은 크기를 키우고, 그에 대한 의심은 곧 호기심이 되었다.
“그 빚, 내가 갚아 줄까 하는데.” 6년 만에 다시 마주친 서연의 전 약혼자, 차무택이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차무택의 도움만큼은 절대 받을 수 없었다. 그 빚이 누구 때문에 생겼는데. “평생 갚다 죽는 한이 있어도 차무택 씨 도움은 받을 생각 없어요. 그때도, 앞으로도.” 서연은 싸늘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매몰차게 거절했으니 그대로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무택과 자꾸만 지독히 얽히게 되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 그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낼 만큼. “그런데 어떡하지.” “…….” “남는 방은 많아도, 침대는 한 개밖에 없거든.” 서연의 첫사랑, 헤어진 옛 약혼자. 그리고 이제는 원수의 아들이 되어버린 남자. 그와 아무 감정 없이 동거할 수 있을까.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하루빨리 취직하여 저택에서 나가는 것. 고지가 멀지 않은 지금, 별채의 주인 백재경이 돌아왔다. 나를 자기네 개 취급하는 그 남자가. “제가 연애를 하든 취직을 하든 제 인생에 참견하지 마세요.” “응, 다음 주부터 내 밑으로 출근해.” 재경의 뻔뻔한 낯짝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본인은 약혼까지 할 예정이면서 왜 제게 이래라 저래라인지. “설마, 아직도 나 좋아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안다. 백재경에게 따라붙는 방탕한 수식어가 얼마나 화려한지 모르지 않으니까. 아니나다를까 재경이 재미있다는 듯 잘생긴 눈매를 휘었다. “그랬으면 좋겠어?”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일그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설은 충동적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고백했던 다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설아! “승환아, 우리 사귀자.” 지켜보던 재경의 눈썹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가슴 속에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일었다.
국내 최대 방산업체 현강 그룹의 이사헌 상무. 가장 유력한 후계 구도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자, 의붓형제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 다툼의 한가운데서 늘 승기를 거머쥐는 지안의 잘난 상사. “상무님, 정신이 드세요? 괜찮으세요?” 사헌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지안은 심장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만큼 가슴이 조여들기까지 했다. “……여보.” 그런데 눈을 뜬 남자가 조금 이상하다. “네? 사, 상무님, 저 한지안 비서입니다.” “여보야, 나 머리 아파.” 완벽한 그녀의 상사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심지어 그녀를 애인이라 착각한 채로. *** “내일 후회 할 짓 하지 말고 내려.” “……개새끼.” 하, 사헌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지안이 원망이 가득 묻은 눈으로 사헌을 바라보았다. “먼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할 땐 언제고.” “…….” “처음부터 혼자 멋대로 날 애인이라 착각해 놓고! 기억을 잃기 전부터 나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지안이 울면서 그의 어깨를 마구 쳤다. 갈가리 찢긴 가슴이 너덜너덜해져 걷잡을 수 없이 아려 왔다. “기억에 없는 일이야.” 짧고 단호한 그의 대답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진다. 지안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헌 씨, 나 정말 힘드니까…… 그만 돌아와요. 제발…….” 사헌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마치 선고를 내리듯 차갑게 말했다. “죽었다고 생각해요.” “……뭐라고요?” 냉정한 그의 말에 지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사헌이라는 남자는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흔들리던 눈동자에서 툭 떨어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꺾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