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연실
채연실
평균평점 4.50
플레어
4.5 (1)

세상이 합심해서 효신을 농락하는 것 같았다. 나라는 망했고, 부모는 그녀를 버린 데다가, 얻어맞고 줴뜯기는 종년 팔자까지 떠올리자면 효신은 속에서 천불이 이는 듯했다. “조선 밖으로 나간다고 종년살이 벗어날 성싶으냐.” 개중 가장 큰 장작은 단연 주인집 도련님, 윤산영의 냉랭한 눈길이다. 천한 것에게 아량을 베풀듯 시선을 내리는 귀족적인 오만함. 내가 감히 너를 보아 주었다는 못마땅한 눈빛. 게다가 희고 단단한 손놀림으로 바이올린 현을 퉁퉁 튕기는 꼴은 또 어떠한가. 예민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저 바이올리니스트가 힘차게 활을 휘갈길 때면, 효신은 뱃속에서 간질거리는 화염을 기필코 모른 체해야 했다. “종년 팔자 어디 가겠습니까. 여기 꼭 붙어 있다가 이 집 귀신이나 될랍니다.” 이 풍진세상을 등지면 펄펄 끓는 화기가 좀 가라앉을까. 차라리 칵 죽어 버리면 이 서러운 불길도 잠잠해질까. 효신은 그렇게 세상에서 제가 삭제되길 소원했다. “……그러든지.” 그녀가 뿜어낸 불티 한 톨이 그에게 옮겨붙어 순식간에 활활 번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 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개정판입니다.

불법 과외

1981년 서울.  한양일보의 고명딸. 성벽 안의 공주 장예라에게, 입주 과외 선생이 붙었다.  “현정운입니다.” 친오라비의 동문, 타고난 수재, 대단한 족집게라나 뭐라나. 고른 눈썹 아래로 움푹한 안와, 얇은 쌍꺼풀과 선 굵은 콧대가 퍽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샹들리에 빛에 반짝이는 밤색 머리카락과 밤색 눈동자였다.  “나는 퍽 엄격한 선생입니다.”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예라가 흠칫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은 영 탐탁지가 않다.  “복종 않는 학생을 아주 싫어해요.” 도망칠 곳도 없이 시선이 맞닿았다. 겸양이라고는 없이 노골적인 시선에 꿰뚫린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마치 끔찍한 것을 바라보듯 그녀를 샅샅이 관찰했다.  “그러니 협조하세요.” “…….”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순식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예라는 서럽게도 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