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새끼가 갑자기 왜 나타났을까, 아무리 머리 굴려도 답 안 나오지?” 유주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떴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이유 없이 잘린 이유가, 숱한 면접에서 자신을 거절했던 그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왜 그랬어?” “그게 아니지. 오죽하면 내가 그랬을까, 그게 중요하지.” 이만큼 했으면 됐다는 그의 말투에 유주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유주야, 나는 다루기 쉬운 사람을 좋아해.” “…….” “알잖아, 그러니까.” 이글거리는 류재하의 눈동자는 검질기고 사나웠다. 계속 그를 마주하다가는 온몸이 바스러질 거 같았다. “까라면 까.”
딸랑— 무령(巫鈴)이 울리면, 희령은 무녀가 된다.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그것도 절대 모르게 하고 싶은 남자에게 들켜 버렸다. 자괴감에 휩싸인 그녀는 결국 그를 밀어낸다. “그동안 잘해 줘서 감사했어요.” “그동안 내가 뭘 잘해 줬는지 얘기해 봐요.” “……” “말 못 하는 거 보니, 잘해 준 게 없는 거잖아.” 더는 무녀의 삶에 휘둘리지 않게 끈을 잘라주겠다는 남자. 부모 세대부터 얽힌 질긴 악연을 단숨에 끊어내겠다는 남자. 딸랑, 딸랑, 딸랑— 단단한 열매처럼 엉켜있던 놋쇠가 강렬하게 부딪치며 하나씩 부서져 내린다. 마치 그녀의 거짓된 삶을 부숴버리듯. 물이 끊이지 않는 임신일주의 김희령 불이 꺼지지 않는 정사일주의 정도하 물이 불을 덮은 것인지, 불이 물을 태운 것인지. 물과 불의 만남, 운명의 쳇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겪어 볼래요? 정사 잘하는 남자, 희령 씨는 임신 잘하면 되겠고. 그게 진짜 잘해 주는 거 아닌가.”
“우정, 결혼할래요?” 담장처럼 높고 견고해 보이는 남자, 윤재익. 무심한 태도 뒤에 얼음처럼 단단한 의지를 감춘 그는, 사람의 마음을 거침없이 조종했다. 입으로는 다정한 말을 건넸지만, 눈빛은 서늘하게 빛났다. “…….” 느닷없는 청혼에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온갖 미사여구보다 더 달콤하게 들린 건 그녀가 목말라하는 돈이었다. “서연호 씨, 돈 필요하잖아요. 그만큼 주겠다는 겁니다. 내 조건이 제대로 이행되면.” 그 뒤로 공식처럼 들러붙는 조건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믿어요.” “왜, 저예요?” “서연호 씨만큼 돈이 절박한 사람이 없어서.” 철저하게 그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건이었다. “내 결혼인데, 회장님이 언짢아한다고 마음에 없는 상대와 결혼해야 하나.” “그 말은, 저는 마음에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의 삶에 족쇄가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뿐이다. 이 시간이 지나고 방문이 닫히면 윤재익은 다시는 이 방문을 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연호는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사랑, 그 하찮은 감정에 놀아날 일은 절대로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