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잠자리 상대. 아니, 안는 베개가 되어 달라고 하면 이해하겠지.” 프랑스로 향하는 전용기에서 만난, 빌어먹게 잘생긴 남자. 그의 10억 원어치 시계를 깨 먹었을 때부턴, 빌어먹을 채권자였다. 하다 하다, 회사에서 사장님으로서 마주친 그는 한별에게 다짜고짜 ‘잠자리 계약’을 요구하는데. “정말로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세 시간 동안 내 침대,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아니면, 이 시계 비용을 바로 갚을 건가?” “그건…….” “착각하지 않으면 좋겠군. 서로의 삶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남남 관계. 당신이 해 줄 건 잠을 재워 주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자비에의 무심한 목소리가 뚜렷하게 공간을 울렸다. 눈동자는 검고 깊은 심해처럼,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어 보였다. 더없이 아름답지만 무섭고도 잔혹해서, 빠져들면 산산이 부서질지 모른다는 위험 신호. 그저 매혹적인 덫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3개월간의 계약 끝에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달콤하고 짙은 낮잠 같은 관계라고. *** “잠이 안 와. 베개가 없어서.” 아니, 당신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단순히 불면을 고쳐 줄 잠자리 파트너 그 이상이 되어 버린 여자. 계약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어차피 지금의 시간도 서로 다르게 기억될 터였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해야겠어.” “무, 무슨?!” 침대에 던져진 한별은 그녀를 완전히 덮쳐 끌어안는 자비에의 품에 파묻혔다. 혼미해질 정도로 강한 힘. 귓가에 흐트러진 그의 호흡이 새어 들어왔다. “내 옆에 잡아 두는 것 말이야.” 갈망. 귓가에 닿는 건 그의 숨결이 아니라 갈망이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지만, 고조되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더 짙어진 갈망.
"내가 좋아, 현정이가 좋아?""뭐 그런 걸 물어봐, 당연히 너지."제 남편과 절친이 한 침대에서 나누는 대화에 현정은 눈앞이 흐려졌다.모두 거짓말 같았다.왜 저 둘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걸까.자신의 작품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미 아이까지 낳고 가정을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완벽한 거짓을 보이며 자신을 농락한 둘에게 복수해야만 했다.그래서, 가장 위험한 남자의 손을 잡았다.* * *집요한 승하의 눈이 현정의 이마부터, 콧날, 입술까지 끈적하게 훑었다.그는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비틀린 시선으로 그녀를 포획하고 있었다.두껍게 가리고 눌렸던 승하의 욕망이 팽팽하게 옥죄어 와서. 그대로 그의 입속으로 삼켜질 것만 같이 아찔했다.승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현정의 귀를 보며 피식 웃었다.“이규성 같은 쓰레기는 버려요. 내가 남편 대타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