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놋
이놋
평균평점
오만한 프러포즈

“어딜 내려가요, 이제 시작인데. 달궈 놓고 내뺄 건 아니지?” 음악과 밤의 도시, 폴란드의 바르샤바. 얼마 남지 않은 도피의 끝자락. 기막힌 우연이 몰고 온 남자가 영우의 심기를 어지럽힌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제 처지도 잊고 난생처음 일탈을 단행할 만큼. “……그래요, 차승재 씨 입술은 굉장히 뜨겁네요.” 닿은 손을 타고 흐르는 온기와 감전된 듯 저릿한 감각에 취해 남자의 입술을 범한 영우, 남은 이성마저 모조리 휘발되어 수줍음도 잊고 더욱더 과감해진다. “이제 시작이라면서요. 멈추지 마요, 제발.” “진짜 돌겠네요, 너 때문에.” 낯선 나라, 낯선 상황, 낯선 감정.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 있는 낯선 남자, 차승재. 영우는 강렬했던 하룻밤 인연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버린 승재에게서 헤어날 수 있을까.

이혼외전

“내가 번복하면 상무님을 더 괴롭히게 되는 거겠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태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물어도 얘기해 주지 않을 거고요?” “불쾌하기만 할 거야.” 그러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깃든 답이었다. 효원은 아랫입술을 앞니로 꾹 눌러 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듯이 길길이 날뛰던 최인주의 일그러진 얼굴이, 광기가 번득이던 그 매서운 눈초리가 감은 시야를 덮쳐 왔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무섭기만 하니까. 그래서 함부로 함께 이겨 내자고, 곁에 있겠다고 조를 수 없었다.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다른 여자’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가뜩이나 복잡한 사고를 이런저런 문제들이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서로에게 온건한 답은 유일하다는 걸 효원은 이미 알았다. 태오를 위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 이혼이라는 것. 이국에서의 선언이 헛되지 않도록, 알아도 인정하기 싫은 그 답을 이제는 입 밖으로 내어야 했다. “……그만 해요, 우리.” “그래.”

집착이 다정하면

“보호자가 되어 주세요. 그게 제 조건이에요.” 열일곱이었던 윤희서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가뜩이나 기분이 엿같은데, 열어젖힌 창문 틈으로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백승조는 유독 비가 싫었다. 비가 내리던 봄밤에 교통사고로 부친 백명신을 영원히 잃었고, 지독히도 시린 겨울비가 내리던 밤에 곧 숨이 꺼질 듯 기진맥진한 윤희서를 발견한 탓이다. *** “윤희서, 나는 너 안 놔.” 승조는 대놓고 무시하는 희서를 돌려세운 채 우겨 누르듯 딱딱한 어조를 뱉었다. “윤희서는 내가 주웠어, 내 거야. 그 사실은 안 변해.” 무심하던 시선이 들렸고, 드디어 눈을 맞춘 희서가 결국 여린 한숨을 토했다. 차를 내어 주겠다던 드물게 후한 마음도 사라졌는지, 손에 쥔 티백을 구기고는 초연하게 읊조렸다. “유실물 취급하지 말아요. 그건 정당한 거래였잖아.”